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ChatGPT가 말해주기를 내 사주에는 ‘역마살’ 기운이 강하게 작용한단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보다 새로운 장소와 사람,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 타입이라는 친절한 해석까지 덧붙여서. 역시 나는 모험가 체질인가 싶어 그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근 몇 년을 돌이켜보니 정말 이동이 잦았다. 연인과의 장거리 연애, 혼자 떠났던 몇 달의 여행, 그곳에서 만난 친구를 보기 위한 또 다른 여행들, 약 1년 간의 교환학생 살이, 그리고 또 이사. 낯선 땅에 홀로 떨어져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어디든 내 집을 만들겠다‘는 다짐 덕분이었을 것이다.

 

‘혼자 어디로든 떠나고, 또 정착할 수 있다.‘ 

 

이 사실이 주는 자유로움은 내 존재를 확장시킬 것 같았지만, 사실은 오히려 축소되는 감각에 더 가까웠다. 두려움에 바리바리 싼 짐과 함께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늦지 않게 깨닫게 된다. 

 

거대한 우주 어딘가 한참을 찾아야 보이는 푸른 점이 있다. 이 작은 지구는 빙글빙글 돌아가고, 그 위에서 몇십억개의 삶들이 잠시 함께 돌고 있다.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여기서도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 것이고, 난 그걸 전혀 모르는 상태로 배워나갈 것이다. 운이 좋다면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더 운이 좋다면 나와 함께 배워나갈 누군가들을 만날 수도 있겠다.

 

작고 하찮은 점 하나가 된 나는 어디서든 조금씩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어디든 그곳을 익숙하게 만들고 내 삶이 펼쳐지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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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적응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대개 아주 작은 일들의 축적으로 이루어진다. 외딴 곳에 왔다는 낯섦과 어색함이 솔직한 출발점이다.

 

새로운 땅과 조금씩의 접점이 생기고, 그것들이 선처럼 연결될 때 찾아오는 감각은 안정감이다. 자유로움만큼이나 달콤한 안정감!

 

여러 도시를 거치며 터득한, 새로운 곳에서 나만의 둥지를 트는 여섯 가지 작은 단계를 나누려고 한다. 어디로 이동하더라도 그곳을 ‘우리 동네’로 만들어가는 소소한 방법들이다.

 

 

 

1. 교통수단을 익힌다


 

낯선 곳에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먼저 교통권을 발급받는다. 이 동네에서 가장 저렴하고 편리한 교통권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지하철, 버스 등을 타고 내릴 때 두 번 다 태그해야하는지, 환승이 가능한지, 하차벨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눈치로 배운다. 역무원과의 대화나 전광판, 팜플렛도 도움이 된다.

 

다음으로는 거처에서 가장 빠르게 역으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를 찾는다. 몇 번 다니다 보면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샛길도 여러 곳 보인다. 버스 정류장은 지도가 알려준 그 정류장보다 한 정거장 전의 정류장에서 타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 여러번 다녀보면서 내가 선호하는 길이 생긴다.

 

그것까지 익숙해지면 걷기 차례다. 역 사이 거리가 내 두 발로는 어느 정도인지, 걸어가는 길에는 어떤 가게가 있고 어떤 골목길이 있는지 관찰한다. 걸으면서 비로소 이 동네의 실제 크기와 모양, 냄새를 체감하게 된다. 첫 주에는 길을 헤매며 찍은 사진들이 휴대폰에 쌓인다. 지하철 노선도, 낯선 간판들, 우연히 발견한 처음보는 꽃들까지. 나중에 이 사진들을 보면 모든 것이 낯설었던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활동할 수 있는 반경을 넓히면 새로운 발견과 만남의 기회가 늘어나고, 낯선 곳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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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책로를 알게 된다


 

어느 동네든 주민들이 자주 가는 공원이나 산책로는 무조건 있다. 이 단계를 통해 새로운 장소를 내면화할 수 있다. 

 

‘지도‘와 ’주민 추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어딜 가든 산책이나 조깅을 즐기는 주민은 있기 마련이다. 주민 커뮤니티에서 강아지 산책로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보통 강아지가 산책하기 좋은 길은 사람도 산책하기 좋다.

 

같은 길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는 호기심을 더 가져야 한다. 평소와 다른 길로 돌아가다가 발견하는 언덕길, 피크닉 하기 좋아보이는 풀밭, 시간은 몇 분 더 걸리지만 차가 다니지 않는 길. 이런 길들을 발견하는 순간이 누적된다. 그러면 이 동네의 내 영역이 시작되고 공간의 경계가 넓어진다.

 

특히 날씨에 따라 바뀌는 걸 목격한 길은 더 애착이 간다. 같은 시간에 같은 길로 산책을 나가면 꼭 마주치는 이웃과도 내적 친밀감이 생긴다. 산책할 땐 음악을 듣거나 떨어진 나뭇잎, 떨어진 꽃을 수집한다. 맘에 드는 수집물은 다이어리에 붙여두고, 산책하며 음악도 기록해본다. 내 두번째 뇌나 다름 없는 다이어리에 자리를 내주는 건 마음 한켠을 내주는 것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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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주 가는 마트, 카페, 가게를 만든다


 

처음엔 제일 가까운 마트를 찾는다. 내가 원하는 재료가 없다면 더 멀리 있는 마트에도 가본다. 

 

지도를 뒤져서 내 스타일의 카페와 가게를 찾는다. 몇 번 가서 익숙해지고 있는 카페가 하필 만석인 날도 있다. 이 때가 가장 신나는 때다. 얼른 지도 앱을 펼쳐서 가장 가깝고 내 스타일과 잘 맞을 것 같은 곳을 찾는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카페나 가게에 가게 된다. 그 중 유난히 좋았던 곳들은 영감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심리적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어느 날 문득 쿠폰에 도장이 여러 개 쌓이고 적립 포인트가 꽤 모인다. 사장님이나 알바생과도 편안한 인사가 오가기 시작한다. 나는 더 이상 완전한 이방인은 아니다. 조금씩 달큰한 소속감을 느낀다.

 

카페에선 자신만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진 찍기를 삼간다. 대신, 보기 좋은 라떼 아트나 아메리카노에 비친 창밖 풍경, 맘에 드는 색감의 책상과 의자,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현지인들을 그림으로 그려본다. 내 시선으로 재구성해서 그리는 그림은 오히려 사진보다 기억에 오래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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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서관을 찾는다


 

도서관은 정말 묘한 곳이다. 모두에게 개방되어있지만 조용히 개인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만 모여있는 장소다.

 

처음 도서관에 가면 탐색부터 시작이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어느 자리가 좋은지, 화장실은 어디인지, 어떤 서비스가 있는지. 정장을 차려입고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 근처 학교에 다니는 것 같은 학생, 부모와 함께 책을 보는 아이들이 보인다. 탐색하러 온 나는 괜히 그들을 방해하는 것 같아 소심해진다.

 

어떤 도서관은 락커 안에 큰 짐은 모두 넣어야 한다. 작은 바구니 하나에 들어가는 필수품들만을 들고 들어갈 수 있다. 어떤 도서관은 회원권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있다.

 

하지만 몇 번 가다 보면 그런 규칙들에는 금세 익숙해지고 나만의 자리도 생긴다. 인기가 많아 얼른 차지해야하는 창가 앞 자리, 책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리, 2층 끝에 있는 벽을 바라보는 조용한 테이블. 그리고 누구나처럼 당당하게 앉아 내 자리를 펼친다. 나도 이 공간의 일부다.

 

도서관은 어느 지역을 가든 다 비슷한 향기가 난다. 종이 향이 흠뿍 나고 사부작 거리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크게 들린다. 모든 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 가면 읽고 싶은 책이 여러 권 쌓인다. 평소에 집중이 잘 안됐던 책도 밑줄을 그으며 읽어내려간다. 특히 좋았던 몇 문장을 메모해두면 일기의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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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네 축제나 극장에서 관객이 된다


 

동네 축제 포스터나 인스타그램 계정, 혹은 동네 주민의 추천으로 공연을 보러 간다. 관객석에서 공연자의 요청에 따라 일어나고 호흥하고 함께 박수를 친다. 이 공간의 공동체가 되어 사람들과 시간을 공유하고 공간을 공유한다. 웃을 때 함께 웃고, 숨죽일 때 함께 숨죽인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 함께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고 나면 이곳은 단순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곳’이 된다. 예술에는 어떤 힘이 있어서 움추린 마음도 자꾸만 열게 하는데, 어떨 땐 내가 이 세상의 일부임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전통 축제는 그 장소의 문화적 맥락을 읽게 해준다. 그 경험이 대화의 물꼬를 터서 새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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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공간을 내 것으로 꾸민다


 

집이나 방 등을 나만의 방식으로 꾸미고 언제고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나의 물건’을 ‘나만의 방식’으로 배치한다.

 

가져온 책들을 선반 위에 나만의 순서대로 꽂는다. 챙겨온 포스터들과 사진을 꺼내둔다. 이곳저곳에 붙여본다. 벽에도 붙이고 거울에도 붙인다. 조명도 내가 가장 안정적일 수 있는 방식으로 배치한다. 저녁엔 간접등만 켜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내 행동 양식, 내 행동 반경에 따라 물건을 정리하고 꺼내쓰기 쉽도록 분류한다. 낯선 공간이 편한 공간으로 점점 바뀐다.

 

향초나 룸스프레이 가게에서 ‘내 방’ 향을 구입한다. 반려식물을 들이는 것도 방법이다. 보살필 수 있는 것 하나를 방에 두면 안정감이 든다. 처음 이사 온 날의 휑한 방에서 하나씩 늘어가는 소품들, 집들이 온 친구의 선물까지 나의 것들이 방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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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계들을 거치면서 나는 서서히 이방인이자 관찰자에서 동네주민, 참여자로 변해간다.

 

그리곤 어느 날 외출 후에 문에 들어서면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게 된다.

 

 “아이고, 드디어 집이다!“

 

다음으로 또 내 집이 될 곳은 어딜까. 생각만 해도 배에 나비가 든 것 같다.

 

 

너는 우주의 자식이다

그 점에선 나무와 별들과 다르지 않다

넌 이곳에 있을 권리가 있다

 

 - 막스 에르만, 잠언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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