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폴 슬링과 화이트 러시안을 기다렸다.
지난해 초가을 방문하였던 음악 선술집을 다시금 찾은 것이다. 동일인과 동행하였는데, 이전에 보냈던 시간이 여간 쏠쏠해서였을까, 근방에 이르니 문득 떠올랐다.
오픈 시간에 대강 맞춰 들어갔으나, 아쉽게도 가게의 문을 열진 못했다. 한 쌍의 연인이 선수 쳐 있었다. 교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분위기가 묘연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한때의 우리가 비쳐, 흘긋 보곤 했다.
한 유명인의 추천에 홀려 싱가폴 슬링을 주문하였기에 술 자체는 금시초문이었고, 그러니 처음 맛본 술이어야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었다. 맛의 낯이 새롭지는 않았다. 미각이 둔한지라, 무언가 특별함보다는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나 '섹스 온 더 비치' 같은 술과 진배없게 느껴졌다. (애주가가 보면 혀를 끌끌 찰지 모르나, 내게는 그저 목 넘김이 달곰한 술로 퉁 쳐질 뿐이었다. 이들마저도 베이스가 다르다면 그건 모르는 일이다.)
익숙함은 미였다. 잔에 채워진 칵테일의 색감은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 그 커플을 훔쳐보니 한 사람이 나와 같은 술을 홀짝이는 중이었다. 실은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애송이 같은 걸 마신다고 속으로 키드득거렸는데, 막상 내가 시킨 술도 같으니 몹시 겸연쩍었다. 더욱이 한때 우상이었던 작가가 이런 달짝지근한 술을 마셨다니, 혀끝에선 실망감이 맴돌았다.
테이블이 하나둘 차기 시작해 네 팀 정도 모이니, 사장님은 DJ를 겸업했다. 실은 벽 한구석에 8시부터 11시까지 음악을 소개해 준다는 식으로 명기되어 있었다. 마치 보이는 라디오처럼 말이다. 얼마나 보이냐면 그가 곡을 설명하고서 음악을 틀고는, 곧장 주류와 안주를 제조하러 가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는 어디 미리 써둔 대본이 있는 듯(있을 수도 있고) 술술 곡과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신청곡 위주로 설명하였기에 즉흥적이라면 놀랄 만했다. 두세 곡 정도 지나서였을까, 그는 술을 파는 것보다 음악을 우선시한다고 읊조렸다.
술을 팔아서 돈을 왕창 벌 생각이 없을뿐더러, 지금도 충분히 먹고 살 만큼은 모아두었단다. 번거롭더라도 음악을 소개하는 낙이 곧 운영의 주안인 셈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생각보다 단가가 나간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DJ의 출연료라 생각한다면 싼값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비싼 건 아니다.)

음악을 감상하던 중, 마주하던 일행이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건너편 테이블을 가리켰다. 중년의 연인이 보여 무슨 일 있냐고 입으로만 물으니, 유음이 새는 것만 보였다. 알고 보니 ‘술, 술’ 거리는 것이었고, 그중 한 명도 나와 같은 술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네 테이블 중 무려 세 테이블에서 같은 술을 마셨다. 못해도 백여 종은 돼 보이는 메뉴판에서 그 확률은 단순 산술적 계산보다 큰 수로 다가왔다. 더구나 그날 전까지는 그 술을 몰랐기에, 이 정도로 유명한가 싶었다.
어쩌면 우리는 동시에 그 술을 마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다음에도 그 술을 찾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그들이 의식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나는
우연을 굉장히 의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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