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 있다
세상이 우리에게 부여한 온갖 과업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스물스물 올라오는 생각들이 있다. 잠복기를 거친 바이러스가 활동을 시작하듯, 그 생각들은 우리가 취약해진 틈을 타 정신의 이곳저곳을 찔러댄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지울 수 없는 권태, 그럼에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단함. 결국 항상 똑같은 결론으로 흐른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사실 앞만 보고 달릴 땐 이런 허망함을 느낄 겨를도 없다. 당장의 목표는 고통과 함께 성취감도 동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모든 순간이 탄탄대로일 수는 없다. 달콤한 성취감은 일시적이고, 그 잠깐의 단맛을 위해 감내하는 인고의 시간이 무가치하게 느껴질 만큼 지치는 순간이 분명 찾아온다. 혹은 여전히 고통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목표나 성취를 허락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게 여러 이유로 우리의 질주에 제동이 걸리는 순간, 미뤄온 질문들이 존재를 뒤덮는 것이다.
모두 언젠가 바스러질 것들 아닌가? 끝내 사라질 것들 때문에 이토록 일희일비를 반복하는 것이 삶이라면, 이 무의미한 행위는 애초부터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이미 태어나 버렸고, 당장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고통을 계속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그 어떤 과업으로 인한 고통보다도 무겁다. 이런 근원적인 무게감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보통 회피다. 또 다른 목표로, 또 다른 책임으로, 매사를 허망하게 만드는 필연에 대한 생각을 지워 없앤다. 그리고 이 망각에, 일상 유지라는 명목을 붙인다.
당신은 죽는다.
그리고 나도 죽는다.
인간은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다.
그런데도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어야 한다.
세상에 이토록 부조리한 일이?
하지만 사사키 아타루는 철학의 시작이 바로 이런 속 편한 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쓴 자신도, 그것을 읽는 독자도 모두 죽는다는 강렬한 도입과 함께 논의를 전개시킨다. 그뿐일까, 그는 "애초에 무언가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34p)"며 '비전'이나 '행복' 따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보통의 시도마저 아주 명쾌히 부정한다. 오히려 먼저 있는 목적을 위해 빚어진 삶은 '노예'와도 같다고 말한다.
저자는 거침없는 문장들을 이어나가며, 삶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의미 따위는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인생은 '일단'과 '어쩌다'라는 우연의 연속일 뿐이라는 저자는 이에 대한 간단한 사례를 든다. 평생을 염원하던 특수부대 대신 시시한 훈련 조교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그렇게 익힌 훈련법으로 테러리스트를 진압하며 국가적 영웅이 된 남자. 사실 비슷한 사례야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카페 경영을 배우러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국밥집을 차리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니던가.
한편 세상이 우리를 움직이는 논리는 이런 우연성과는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 모두에게 각자의 쓰임이 있고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한다는 식이다. 이 통념에는 비전과 계획, 실행과 결과까지가 곧게 뻗은 직선처럼 죽 그여 있다. 그 직선 속에서는 모든 과정이 맞물려 돌아가고, 한번 꼬여버리면 이후의 삶 모두가 망가져버릴 듯한 불안이 몰려온다. 이대로 내 존재가 쓸모가 없어지면, 대체가능해지면, 그래서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 우리가 겪는 고통의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불안을 유발하는 우리의 욕망마저 사실은 타인의 욕망에 '오염'된 모조품이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유일무이함은 죽음이라는 필연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정작 나 스스로는 나의 죽음을 끝마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완수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죽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죽음은 늘 '타인의 것'이다. 나에게만 존재하는 '나의 죽음'을 체험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86p)".
타자가 없으면 '나'는 죽을 수 없다.
죽음을 끝마칠 수 없다.
(...)
'장례'라는 의식이 인간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저자는 인류가 위와 같은 죽음의 아이러니를 다뤄온 방식으로서의 '장례'에 주목하며, 장례와 같은 의례가 인간 사회의 필수 요소임을 짚어낸다. 그에 따르면 "의례란 감성적인 반복을 통해 '주체'를 형성하는 절차다(101p)". 의례는 대표적으로 국가 및 종교와 같은 시스템에 의해 행해지며, 수많은 '주체'들을 생산해낸다. 필연적 죽음과 그에 따른 삶의 무의미함에 모두가 압도당하지 않도록.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는다. 우리가 이뤄낸 모든 것, 심지어는 우리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마저도 언젠가는 반드시 잊힌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아 무의미하게 사라져가는 사실을 계속 마주하는 것. 그것이 '삶'이다(150p)". 하지만 세상은 이 사실을 곧이 곧대로 적시하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죽음 뒤 내세를 위해, 혹은 그 무엇을 위해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며 반복적으로 삶의 이유를 제시한다. 그야,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고, 삶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니까!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 전제(근거율: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가 가진 내재적 모순을 짚어낸다. 바로 근거율은 그 자체로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전제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일까? 왜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인생에 당연한듯 이유를 부여하고, 또 그것을 원동력 삼아 살아가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의례가 작동한 지점이다. 삶의 허망함을 의례와 시스템으로 다루어 온 인류의 요령이다. 삶의 이유, 그리고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근거율 자체를 평생의 '의례'를 통해 내재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사사키 아타루는 모든 것이 우리가 만들어낸 의미일 뿐이라며, 독자를 무의미함 속에 던져놓고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제안한다. 우리는 '예술'(여기서 저자는 예술을 좀 더 넓은 의미로 정의한다)을 통해 죽음이라는 필연을 웃어넘기듯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완공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남은 생애를 대성당 건축에 바친 가우디의 일화를 말미에 덧붙인다.
스스로 완성을 보지 못하는 건축물.
미완성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향한 가우디의 헌신은 '시간과 죽음', 즉 유한한 삶을 '업신여김'이다. 힘찬 단언이다.
그의 사망 이후 100년 가량이 되어서야 완공을 바라보는 가우디의 역작. 그의 헌신은 종교적 배경(죽음 이후의 영생을 가정하는)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적어도 저자는 위 일화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가능성마저 부정하지는 않는다. 분명 우리는 우리의 단일한 유일무이함인 죽음마저 제대로 끝마칠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언제나 미완의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삶은 결국 우리 손으로 완전히 완성할 수 없는 건축물과도 같지만, 그 위에 벽돌 한 장을 쌓아올릴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 역시 우리다. 그것이 인간이 '예술'로서 필연을 웃어넘기는 방법이다.
그러나 죽음을 '웃을' 수는 있으리라.
구원의 부재를 웃을 수 있는 주체로 재설정할 수 있으리라.
(...)
아무것도 허락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세상에 태어난다.
살아 있는 이상 언젠가 죽어야 한다.
백 년, 천 년 후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술이 있다. 예술을 통해 운명을 '웃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우리의 운명을 비극이 아니라 희극으로 만들 수 있다.
'모두를 위한 철학 입문'이라는 제목만큼, 저자의 논리는 놀라울 만큼 명료하고 간단하다.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르는 철학사 개괄이나, 각종 철학 사조의 요약 같은 접근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간결하지만 우리 삶의 핵심을 꿰뚫는 질문을 제시할 뿐이다. 모든 것을 무로 귀결시키는 죽음을 직면하게끔 하는 그의 힘 있는 문장들은 단순한 체념보단 담담한 받아들임에 가깝다. 일단 받아들이고 나야,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결국 온전한 수용 뒤 따라오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선명한 깨달음이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 필자보다 훨씬 명료한 답을 얻었을 저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인용해본다.
삶에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의미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의미를 부여하는 편에 서 있습니다.
(...)
소중한 누군가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
사랑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아무리 우리의 삶과 죽음이 덧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의미'를 부여할 힘이 남아 있습니다.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삶에는 애초에 주어진 목적도, 필연적인 의미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공허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낼 자유를 갖게 된다. 우리가 죽음의 운명 앞에서 취해야 하는 태도는 당장의 회피가 아니라 ‘부여’다. 끝맺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저 위에 벽돌 한 장을 올려놓듯, 사랑으로 의미를 불어넣을 때 삶은 비로소 우리만의 예술이 된다. 그렇다면 인생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에 불과한 비극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웃으며 완성해가는 희극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