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학창 시절 내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에는 조그마한 상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1층 슈퍼에서는 콘칩이나 스윙칩, 쌍쌍바를 사서 먹었고, 2층 글쓰기 학원에서는 또래들과 빙 둘러앉아 단편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가장 좋아하고 자주 들락거렸던 곳은 만화방이었다. 적은 돈을 내고 만화책이나 소설, DVD를 빌릴 수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까지 시골에서 살았던 내게 만화방은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특히 순정 만화에 푹 빠지게 된 나는 완결이 나면 전권을 대여해서 늦은 시간까지 학원 숙제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작가들이 만든 세계에서 온갖 감정을 느끼곤 했다. 지나치게 많이 읽다 보니 순정 만화를 고르는 나만의 기준도 생겼다. 그 시절에 읽은 <다정다감>, <코이바나>, <파르페틱>, <한낮의 유성>은 아직도 서사와 그림체가 생생히 기억난다.


나만의 순정 만화 탐독은 이십 대 중반이 되고 자연스럽게 명맥이 끊겼다. 끊긴 이유에는 다양한 해명들이 존재한다.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남아 있는 순수와 낭만을 거의 소진해서. 그러다 올해 초, 직장을 관두고 간만에 긴 휴식이 찾아왔을 때 불현듯 한때 주야장천 읽었던 순정 만화들이 떠올랐다. 동전과 지폐를 내고, 종이를 한 장씩 넘겨 읽었던 만화책은 이제 어플리케이션에서 구매를 하고 스마트폰의 매끈한 액정을 느끼며 읽어야 하는 모양새로 바뀌었다. 어떤 작품은 여전히 마음을 울렸고, 어떤 작품은 유치하고, 어떤 작품은 시류와 맞지 않아 읽기를 멈췄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그림체와 서사처럼 내 마음 역시 닳을 대로 닳아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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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시선으로 새로 읽을 순정만화를 찾다가 발견한 <너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아련한 제목과 가는 선이 매력적인 그림체는 여태껏 접해왔던 작품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게다가 ‘고1 남녀 4명, 전원 짝사랑 중.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청춘 군상극!’이라는 문구도 내게는 다분히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뻔했지만 원래 아는 맛이 무서운 법. 속는 셈 치고 한 권만 구매해서 읽기로 했다. 발매된 전권을 모조리 읽은 뒤, 나는 이 작품이 연재 중이라는 안타까운 사실에 직면하고는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나의 예상을 전부 빗나간 짝사랑 이야기. 그래서 다음 권이 발매될 때까지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이야기. 이 ‘남다른 순정만화’에 관한 상념을 반복적으로 곱씹어 본다.

 

 


마구잡이로 엇갈린 어린 사랑들


 

<너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는 같은 반에 모여 있는 히카리, 마리, 오타니, 아사기리를 주된 인물로 내세운다. 작품은 각 인물의 시점을 차례대로 비추며 이들이 짝사랑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밝혀낸다. 대개 남자 둘, 여자 둘이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경우에는 마음이 통하는 둘씩 짝을 지어 커플이 되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쌍방으로 연결된 사랑의 작대기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 명의 짝사랑 관계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차분하고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히카리의 짝사랑 상대는 반에서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하는 오타니다. 교실에서 자신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오타니를 보며 히카리는 그의 서글서글하고 다정한 성격에 호감을 품지만, 그 마음을 오타니에게 고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오타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히카리의 절친인 마리이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평범하기 그지없다고 여기는 히카리는 충동적으로 마음을 전하기보다는, 귀여운 마리와 호감상인 오타니가 연결되는 게 자연스럽다 생각하며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감춘다.


물론 오타니의 경우도 희망적이지 않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타인과의 대화를 어려워하는 마리는 오타니가 마음을 전할 새도 없이 도망가기 바쁘다. 게다가 마리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상대는 다름 아닌 국어 교사이자 취주악부 고문인 마츠다이라 선생님이었다. 사제지간에 로맨스가 성립될 리 있을까. 교사이자 성인인 마츠다이라 선생님에게는 이미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고,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당연히 마리에게 학생 그 이상의 감정을 품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아사기리의 짝사랑 상대는 히카리다. 친모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 중학교 시절 다이빙을 시작한 아사기리는 부모가 이혼하자 다이빙을 관둬버린다. 모든 일에 무료하다는 얼굴로 일관하는 아사기리는 자신과 달리 시간이 날 때마다 호른을 연습하며 노력과 열정을 투자하는 히카리를 은근히 동경하게 된다. 덧붙여 말하자면, 작중에서 아사기리는 넷 중에서 유일하게 짝사랑 상대에게 마음을 표시한다.


보통 연재가 진행될수록 최종 커플의 윤곽이 뚜렷해지기 마련이지만, 꼬일 대로 꼬여버린 <너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의 인물 관계에서는 최종 커플의 양상이 짐작되지 않는다. 하지만 궁금증과 조급함은 발매까지 시간이 걸리는 만화책에서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예측 불가능한 이 사각관계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걱정이 들면서도, 각 인물의 시점을 따르는 서사의 전개로 인해 모든 인물에게 애정을 품은 채로 응원하게 되는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납작한 라이벌이 아닌 입체적인 동지


 

일반적으로 순정만화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인물이 꼭 한 명씩 등장한다. 이 인물이 여성으로 등장할 때는 남자 주인공의 과거 연인이거나 여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는 악인으로 나타나고, 남성인 경우에는 여주인공에게 순정을 내비치면서 메인 커플을 흔드는 경우가 태반이다. <너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에서 나타나는 뒤엉킨 사각 구도도 이런 클리셰를 답습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초반에 있었지만 의외로 작중에서는 이분법적인 선과 악의 구도를 따르기보다는 인물이 지닌 입체적 양상에 주목한다. 이 입체성은 선에 조금 더 가깝고 솔직함이라는 장식까지 매달고 있기에 매력적이다.


오타니가 마리를 좋아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한 히카리는 마리에게 질투나 경쟁의식을 갖지 않는다. 예컨대 손을 다친 오타니가 걱정되었던 히카리는 마리에게 반창고를 빌리고, 그걸 오타니에게 줄 수 있냐고 묻는다. 만일 히카리가 마리를 라이벌로 여겼다면 곁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히카리는 소심함을 단점으로 여기는 마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때 그랬잖아. 입학 전에. 고등학교 가면 친구도 많이 사귀고 청춘을 누리겠다고! 연습해야지!” 이 밖에도 히카리는 하굣길에 오타니와 마리가 단둘이 갈 수 있도록 일부러 거짓말까지 해가며 자리를 비켜주거나 연주회 티켓을 주며 오타니의 사랑이 이뤄질 수 있도록 갖은 도움을 준다.


눈에 띄는 지점은 히카리와 아사기리가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발견된다. 아사기리의 고백을 받았지만, 그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 히카리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난 오늘 굉장히 간사한 마음으로 왔어. 아사기리랑 잘 되면 짝사랑 같은 건 이제 안 해도 된다고.” 그 말을 듣고도 아사기리는 그 간사함을 자신에게 내비쳐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사기리의 처지를 이해하는 히카리는 그럴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한다. 히카리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아사기리는 한 가지 제안한다. “약속해줘. 신타로(오타니)에게 꼭 네 마음을 전하겠다고. 그럴 수 있으면 나를 차도 좋아!” 히카리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반드시 그럴 거라고 답한다. 같은 처지에 놓인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연대의 기류가 흐른다. 이들이 맺은 약속은 짝사랑이 비참하고 외로운 성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며, 씩씩하고 굳센 짝사랑의 가능성을 어렴풋이 드러낸다.

 

히카리와 아사기리가 솔직하게 진심을 전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말한다면, 마리와 오타니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한다. 이들은 상대의 곁에서 도움을 주거나 행복을 빌어주는 은은한 방식으로 사랑을 표시한다. 방식의 차이가 있지만 네 명의 인물 모두 자신이 품은 사랑의 크기가 소중한 만큼, 상대의 마음을 존중한다. 그래서 이들은 이기적으로 사랑을 함부로 뺏거나 쟁취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짝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묶인 이 관계가 불편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랑의 크기와 비례하는 꿈


 

순정 만화에서 사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가치다. 학업이나 업무를 제쳐두는 일은 다반사고, 심지어 가족을 등지는 극단적인 양상도 보인다. 제아무리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득 머금은 순정 만화여도 현실의 독자들은 그 점 때문에 반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랑의 열병을 앓느라 학교와 회사를 빠지고 앞날을 위한 준비를 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한창 짝사랑에 열중하고 있는 <너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의 인물들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원인에는 바로 이 경로와 반대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취주악부에서 호른을 연주하는 히카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립슬러를 연습한다. 건초염을 예방하기 위해 선생님이 알려준 마사지도 꼬박꼬박하며 실력을 다져나간다. 그럼에도 항상 평범한 자리가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여긴다. 3학년의 포지션을 맡게 되며 1번 자리에 안착했을 때도 그녀는 취주악부 고문인 마츠다이라 선생님에게 원래 자리로 바꿔 달라고 부탁한다. 히카리의 본심을 이미 알고 있던 선생님은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하는 게 맞다며 히카리의 사기를 북돋아 준다. 짝사랑까지 병행 중인 히카리는 오타니에게 멋있다는 칭찬까지 받으면서, 합주 시간에 자신의 실력을 훌륭하게 증명해 낸다.


입 밖으로 말 한마디 꺼내기 어려워하는 마리는 소설을 쓰게 되면서 가장 눈부시게 변화한다. 짝사랑 상대인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마리가 쓴 독후감을 읽고 나서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소설을 써보면 좋을 것 같다고 권유한다. 초반의 마음가짐은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지만, 소설을 쓰면서 마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트라우마와 직면하기로 한다. 작은 목소리, 자신감 없는 태도, 가족마저 이해해 주지 않는 환경이 마리의 소설에 녹아들고 그녀는 밤을 새우면서까지 소설 한 편을 완성해 낸다. 그리고 자신에게 좋은 작가가 될 거라고 격려해 준 선생님 덕에 힘을 얻는다. 마리는 선생님과 그의 연인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다음에는 희망을 외치는 소설을 쓰기로 다짐한다.


유명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와 이름이 같은 오타니는 야구부 부원이다. 아침에는 부실 청소를 하고 해가 질 때까지 야구 연습을 한다. 유니폼이 땀과 흙으로 지저분해질 만큼 노력하지만, 오타니의 타격은 주전 선수로 나갈 만큼 뛰어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야구에 진심이며 밝은 얼굴로 연습량을 채운다. 다른 부원들이 공을 던지고 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던 오타니는 대회 당일, 3번 타자의 대타 선수로 출전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멋지게 안타를 쳤음에도 경기에서는 패하고 말았지만, 타석에 선 자기 모습을 영상으로 바라보는 오타니의 눈은 설렘으로 빛난다.


무심한 친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다이빙을 시작한 아사기리는 중학교 수영 경기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부모가 갈라섬과 동시에 다이빙을 그만둔다. 학업, 꿈, 인간관계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시시하다고 생각하며 고등학생이 된 아사기리는 매일 호른을 연습하는 히카리에게 눈길이 간다. 히카리는 다이빙을 관두게 된 아사기리의 사정을 전부 듣고 난 뒤,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그 위로 덕에 아사기리는 다시 다이빙을 시작한다. “모리가 매일 연습하는 걸 보고, 들으면서 나도 그런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일깨워줬어.” 여전히 다이빙대는 다리가 떨릴 만큼 높고 무섭지만, 그 위에 다시 선 아사기리의 마음가짐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이처럼 네 명의 청춘은 꿈을 향해 저마다의 템포로 나아간다. 사랑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으며, 사랑 외에도 스스로를 밝게 빛내줄 가치를 찾아야 한다. <너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는 섬세한 감정묘사와 더불어 각 인물에게 고유한 꿈을 부여함으로써 사랑뿐만 아니라 성장까지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사랑만을 노래하는 여타 순정 만화와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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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니듯 들락날락거렸던 추억의 만화방은 아쉽게도 현재는 폐업한 상태이다. 문을 닫은 시기는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무렵이었고, 노끈으로 묶인 수 천 권의 만화책이 상가 밖에 쌓여 있던 장면은 아직도 또렷하다. 이제는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 가도 만화방의 흔적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다.

 

내가 만화책을 냄새로 기억하는 이유에도 현실에서 사라진 만화방의 영향이 클 것이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라벤더 향이 나는 방향제가 비치되어 있어서 손때가 묻은 만화책에도 그 냄새가 배어있었다. 공들여 그린 미형의 그림체와 심금을 울리는 대사, 다음 권을 기다리게 만드는 촘촘하고 아련한 서사에도 전부 라벤더 향이 났다.

 

<너의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에서도 라벤더 향이 났던가. 그건 확신할 수 없다. 만화책에 스며든 과거의 냄새가 라벤더 향이라면 현재를 통과 중인 만화책에서는 다른 향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완결까지 한참이나 남은 이 작품에서 새로운 향을 발견할 수 있기를. 완결이 되었을 시점, 나는 어떤 향을 맡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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