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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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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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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산업 문명이 붕괴하고 천 년 후 독을 가진 균류가 장악했다. 그들은 썩은 바다 ‘부해(腐海)’라 불리는 숲을 이루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위와 같은 인터타이틀(intertitle)로 시작한다. 문명의 붕괴 이후를 그린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세계관은 분명 디스토피아적이다. 그러나 주인공 나우시카와 그녀가 살아가는 바람계곡 주민들의 모습은 절망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는 바람계곡의 풍경은 생존 투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경쟁에 물든 현대인의 삶보다도 건강해 보인다. 특히 비행 장치 메베를 타고 광활한 하늘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나우시카의 자유로움은 부러움을 자아낸다. 물론 그들에게도 근심은 있다. 점차 영향권을 넓혀오는 부해가 그것이다. 독성 곰팡이가 가득한 부해가 세상을 뒤덮는 순간 인류는 제2의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러한 위협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세력이 군사국 토르메키아다. 바람계곡을 침공한 토르메키아의 사령관 크샤나는 부해를 태우고 인간 세계를 재건한다는 조국의 목표를 밝힌다. 독과 곤충의 공포에서 해방해 줄 테니 왕국 건설에 협조하라는 것이다. 추락한 토르메키아의 비행선이 싣고 있던 것은 불의 7일 동안 온 지구를 불태운 거신병의 알이었다. 거신병을 부활시켜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토르메키아의 이상은 얼핏 그럴 듯하지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을 무력으로 지배하고 강압적으로 복속시키는 토르메키아의 모습은 오늘날의 제국주의 국가들을 연상시킨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약탈할 때 공통적으로 내세운 논리 역시 이러한 유토피아였다. 미개하고 가난한 삶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선진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것. 그들의 유토피아 덕에 지난 30년간 전 세계 평균 해수면은 9.8㎝ 상승했고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 열대우림은 이미 15%가 소실되었다. 환경 오염을 둘러싼 우려의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려오지만,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멈추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두 세계를 잇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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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낸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창립자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그런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다른 여러 작품과 마찬가지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곳곳에서 생태주의적 메시지가 들려온다. 지브리가 이 같은 문제를 다룰 때 자주 사용하는 방식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자적 존재를 내세우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 혹은 자연의 세계에 속해 살아가면서도 다른 세계와 교감하며 두 입장을 조율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 중심적 관점에 길들여진 관객에 대한 일종의 완충 지대로 기능한다. 익숙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가 가리키는 낯선 존재들, 즉 자연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나우시카 역시 그러한 인물이다. 그녀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환경친화적 공동체인 바람계곡의 공주이자 곤충을 비롯한 동물들과의 특별한 교감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려고 부해의 식물들을 채취해 정원을 만든 그녀는 부해의 식물도 깨끗한 환경에선 독을 뿜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또 부해의 밑바닥에 불시착한 뒤 인간이 오염시킨 강과 호수를 부해의 곤충들이 정화한다는 비밀까지 알게 된다. 그녀는 부해를 태우려는 사람들에게 이를 알려 그들을 막으려 하지만 실패하자 분노한 오무 무리에 몸을 바쳐 뛰어든다.

 

오무는 나우시카가 사랑해 마지않는 곤충이자 부해의 수호자이다.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는 인간을 매섭게 심판하는 오무는 대자연의 냉혹한 일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모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나우시카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화되어 분노를 거두고 그녀를 부활시키는 오무의 모습에서는 자연의 모성과 자애로움이 엿보인다. 이는 자연을 단순히 풍요를 제공하는 존재로도, 재해와 파괴를 부르는 존재로도 규정하지 않는 미야자키의 입체적 자연관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생태주의적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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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시카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사랑하며 그들 모두에게서 사랑받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두 세계는 그녀의 사랑에 의해 결국 사랑으로 연결된다. 그녀의 운명은 바람계곡의 장로 유바바가 들려준 전설을 통해 일찍이 예고된다. ‘푸른 옷을 입고 황금 벌판에 내려선 자, 잃어버린 대지와의 인연을 다시 맺어 우리를 푸른 대지로 인도할지어다.’ 처음에 이는 나우시카의 스승 유파를 가리키는 듯했으나 오무의 황금색 촉수 위에서 되살아난 나우시카의 푸른 옷을 통해 전설의 주인공이 그녀였음이 드러난다.

 

그녀의 옷차림은 작중에서 총 2번 바뀐다. 처음의 하늘색 옷은 페제테의 비행선에서 탈출하기 위해 갈아입은 붉은색 옷으로 바뀌고, 미끼로 희생당한 오무 유충의 피를 뒤집어쓰고 다시 파랗게 변한다. 나우시카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동안 벌어진 인간 세계의 전쟁과 살육이 푸른 옷을 입은 그녀를 통해 종식되고 자연과의 화합에 이르는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문명과 자연의 상징적 대비는 크샤나에게 포로로 잡힌 바람계곡 주민들의 대사를 통해서도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당신은 불을 쓰지. 우리도 조금은 쓰지만 지나치게 쓰면 아무것도 안 남아. 불은 숲을 하루에 재로 만들지. 물과 바람은 백 년 걸려서 그 숲을 키웠는데 말이야. 우린 물과 바람이 더 좋아.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알 수 있듯 불은 인간에게 풍요를 안겨준 다양한 기술의 원천이자 문명의 상징이다. 불은 인간의 터전을 일구기도 하지만, 태우기도 한다. 불의 7일, 즉 문명의 붕괴 이후라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문명이 가진 자멸적 위험성을 암시하면서도 황폐화된 자연과 고도 문명의 잔해가 독특하게 공존하는 모습을 그린다. 바람계곡 주민들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면서도 나우시카의 비행 장치와 포자를 불태우는 화기와 같은 문명의 이기들을 활용한다. 이 역시 자연으로의 극단적 회귀보다는 생태와 문명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는 미야자키의 철학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인간과 자연의 갈등을 딛고 모두에 대한 사랑을 실현한 나우시카의 영웅적 면모는 미야자키의 환경 운동가적 일면과 닮아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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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지금의 지브리를 있게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무명 애니메이터였던 미야자키는 이 영화를 통해 명성을 얻고 지브리 스튜디오를 창설하게 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스튜디오 설립 이전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지브리의 작품이 아니지만 첫 작품이나 다름없는 영화로 반쯤 공인되고 있다. 지브리 정신의 원형이라 불리는 작품답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는 지브리의 공식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앞서 언급했던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생태주의적 세계관과 더불어 능동적이고 강인한 여성 인물 역시 지브리 작품들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다. <모노노케 히메>는 주제 의식뿐만 아니라 여성 인물의 묘사에 있어서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함께 놓고 볼만한 작품이다. 주체적인 행동과 선택으로 두 세계의 화합을 이끌어 내는 나우시카는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전사 산의 중간자적 속성과 닮아있다. 마찬가지로 문명과 전쟁을 상징하는 토르메키아의 공주 크샤나와 타타라 마을의 철공소를 이끄는 에보시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역시 맞닿아있다. 이와 관련해 미야자키는 자신의 여성 주인공들에게 친구나 조력자가 필요할 수는 있으나 구원자는 절대로 필요하지 않으며, 모든 여성은 여느 남성과 같이 영웅이 될 역량이 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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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거신병 설정화 / 우 : 에반게리온 초호기 설정

 

 

이외에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미야자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와 사제의 연을 맺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작화 스태프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온 안노의 원화를 보고 감탄한 미야자키는 그를 즉시 채용한다. 그렇게 탄생한 장면이 클라이막스의 거신병으로, 훗날 에반게리온의 모티프가 된다. 이들 역시 비교해 보면 상당히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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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거장의 출발점이자 지브리 스튜디오라는 거대 제작사의 원형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고전적이면서도 지브리만의 감성과 철학으로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으나 지브리의 다른 작품들을 많이 접해본 독자들에게는 큰 울림을 주기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첫 작을 두고 ‘익숙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총 17편의 장편들 가운데 12편을 본 사람의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평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아쉬웠던 점은 결말인데, 인간과 자연의 화합이 결국 여자아이 한 명의 숭고한 희생에서 비롯된 기적이라는 데서 오는 공허함과 굳이 나우시카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연출로 부활시켜야만 했을까 하는 의아함이 남는다. 하지만 이는 당시 절필 위기에 놓여있던 미야자키가 상업성을 고려하여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결말에 대한 권한을 위임한 결과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납득할 만한 정황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합하자면, 비록 특별한 감흥은 적고 아쉬운 지점도 있었지만 무명 애니메이터였던 미야자키를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로 만들어준 저력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지난 6월 25일 한국에서 25년만에 재개봉하여 현재까지 상영 중이다. 지브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팬심으로, 지브리가 아직 낯선 사람이라면 지브리 정신의 정수를 느끼기 위해 관람할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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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barakuta1978
거신병이 에반게리온에 영향을 끼친 것은 맞습니다만
비교이미지로 쓰신 거신병이미지는
 2012년 개최된 특촬박물관전에서 안노 감독이 그린 거신병 이미지입니다
에반게리온 이후 그린 이미지라 당연히 에바에 좀 더 닮아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님이 그리신 이미지는 조금 더 심플한 편이죠
자칫 나우시카 제작 당시 설정이미지로 오인될 수도 있어서 글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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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7 08:27:23 0
모리
안녕하세요, 이지선 에디터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해당 이미지는 말씀하신 전시회(<관장 안노 히데아키 특촬박물관>)에서 공개된 것은 맞으나 안노 감독이 그린 것이 아니라 조각가 타케야 타카유키가 3D 조형용으로 다듬은 디자인 스케치로 확인됩니다. 오인될 만한 이미지를 사용한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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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7 22:02:5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