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미술을 전공하던 시절, 나는 늘 창작의 고통 속에서 헤맸다.
 
흔히 예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야 하면서도, 그들에게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매일을 살았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은 늘 나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수업을 통해 창작의 방향성을 찾고 동시에 예술적인 영감을 얻게 되었다. 그 수업의 첫 번째 과제는, 강의에서 소개되었던 여러 예술가에 대해 공부하고 그들의 작업을 연구하여 나의 작업으로 연결 지어보는 것이었다.

그중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가장 내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한 작가의 작업이 나를 사로잡았고 나의 레퍼런스가 될 예술가로 질리언 웨어링을 선택했다.

질리언 웨어링은 영국의 사진작가이자 비디오 작가이다. 그녀는 데미안 허스트와 함께 YBA(Young British Artist)로 불리며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현대미술을 이끈 주요 미술가 중 한 명이다. 이들은 충격적인 소재와 함께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을 선보이며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였다.
 
 
 
사적이고 불편한 고백

 

Confess All on Video. Don‘t Worry, You will be in disguised. Intrigued? Call Gillian.

"영상에 모든 것을 고백하세요. 걱정마세요. 당신은 변장한 채로 있을 테니까요. 흥미로우신가요? 질리언에게 연락하세요."
 
질리언 웨어링은 이 광고문구를 잡지에 실어 작업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했다. 그리고 이 문장은 그녀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참여자들은 가발을 쓰고 변장을 한 채 카메라 앞에 앉아 혼자만의 비밀을 고백한다. 사람들은 놀랍게도 성적 행위, 범죄, 또는 복수와 같은 극도로 내밀한 이야기까지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영상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딘가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가면을 쓴 사람들의 기묘한 모습 때문일지도, 혹은 지나치게 사적인 타인의 내면을 엿보고 있다는 불쾌한 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Trauma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10대의 얼굴을 본뜬 플라스틱 가면을 쓴 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고백한다.
 
여기서 가면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수단이자 트라우마를 겪었던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장치가 된다. 사람들은 가면을 통해 자신을 숨기면서도 깊은 진실을 드러낸다.
 
Signs that Say What You Want Them To Say and Not Signs that Say What Someone Else Wants You To Say
 
질리언 웨어링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현재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적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종이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단순히 종이를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가볍지 않은 의미가 담겨있다. 경찰 제복을 입은 남성은 ‘HELP’라고 적었고 정장 차림의 남성은 ‘I’m DESPERATE’라고 적었다.
 
적힌 문장들은 직설적이고 투박하다. 그들의 외면적인 모습과 대비되는 그 솔직함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가면이라는 상징

 

세 작업에는 모두 ‘가면’이라는 상징이 등장한다. 정체를 숨기는 수단으로서의 가면, 트라우마를 겪었던 10대의 나로 돌아가는 장치로서의 가면, 사회적 나로 살아가는 상징으로서의 가면이다.

 

사람들은 가면 뒤에 숨어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고백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들과 더 가까워진다. 과할 정도로 매끈하게 만들어진 가면 사이로 보이는 유난히 공허한 두 눈동자, 진실을 고백하는 덤덤한 목소리, 속마음을 적어 내려간 손글씨가 가면 뒤에 가려진 그들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

질리언 웨어링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란 결국 인간적인 마스크를 쓴 존재로서 이를 통해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만, 내면으로 향하는 주관적인 의식과 모습은 그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 두 가지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는 불균형. 나는 이것에 관심이 있다.”
 
외면과 내면, 사회적인 나와 사적인 나. 그 간극은 우리를 어딘가 불편하게 만들지만,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바로 그 불균형 속에서 더 진실된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감독상을 받으며 인용해 더욱 유명해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이다.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던 봉준호 감독처럼, 나 역시 우연히 듣게 된 한 수업을 통해 질리언 웨어링이라는 나의 레퍼런스를 만났다. 그리고 그때 생긴 소중한 가치관은 지금까지도 내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내가 해왔던 작업을 돌아보니 나는 그녀와 많이 닮아있었다.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질리언 웨어링의 영향이 있었다.
 
나는 가장 창의적으로 되기 위해, 나를 먼저 그들에게 드러내면서 내가 내 작품의 첫 번째 참여자가 되기로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틱장애를 앓아왔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그로 인해 겪었던 트라우마적 경험을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겐 틱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받았던 최면 치료라는 특별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최면 상태에서 마주했던 내 어린 시절의 얼굴을 그림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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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작업에서는 평소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나의 일기를 내 방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당신의 일기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누군가 읽는다는 생각에 조금씩 꾸며내는 글도 쓰기도 했지만, 점점 일기라는 형식 안에서 진짜 나의 모습을 꺼내 보였다.

타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당연하게도 유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로의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은 서로에게 또 다른 영감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나도 질리언 웨어링의 작품 속 사람들처럼 최면이라는 수단, 일기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을 통해 가면 뒤에 숨겨진 내면의 얼굴을 마주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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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인 영감은 어디에서든 올 수 있다. 어떤 것이어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카페에서 우연히 엿들은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 인상 깊게 읽은 책의 한 문장.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무한히 뻗어 나가는 나만의 것들은 누군가에게 새로운 영감이 되어 가슴 깊이 새겨질 것이다.
 
이 글 또한 누군가에게 또 다른 영감이 되기를. 그리고 그들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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