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도 하늘도 구분되지 않는 공간, 그 위를 어슬렁거리는 바퀴 달린 발이 있다. 그들은 분명히 죽었으니 산 자라 할 수 없고, 누구도 그들의 끝을 정리해 주지 않으니 죽은 자라고도 할 수도 없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은 지면에 확실히 닿을 수도, 그렇다고 붕 떠서 날아갈 수도 없기에, 그저 그들 발에 달린 바퀴를 굴리며 돌아다닐 뿐이다.
연극 <유령>은 삶의 모든 과정에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유령들의 이야기다. 여기서 유령이란, 죽은 사람의 ‘혼령’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름뿐이고 실제는 없는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서류나 관계로 존재를 입증하지 못했으니 살아서도 유령이겠고, 장례를 치러줄 누군가가 없으니 죽어서도 구천을 떠도는 유령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고, 죽어서도 죽을 수 없는 유령의 삶. 연극 <유령>은 이 지난한 유령의 삶에서 연극을 본다. 삶이란 연극에서 그저 부유할 수밖에 없는, 유령이란 배역을 살아온 존재들은 극을 통해 그들의 삶을 확실하게 떠날 수 있게 된다.
![[크기변환][세종문화회관] 유령 포스터.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6/20250615214510_dqrnkaey.jpg)
주인공 배명순은 남편의 가정폭력으로부터 도망친다. 주민등록은 말소되어 배명순은 정순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삶을 살게 되지만, 서류로 신분을 입증할 수 없는 이른바 미등록된 유령과 같은 그녀의 존재는 어디서도 존재 그 자체로 대우받지 못하고 각종 불합리와 마주하게 된다. 비인간적인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그녀가 도착했던 세상의 곳곳엔 다양한 폭력들이 즐비했고, 운명은 애석하게도 그녀의 몸에 질병을 움트게 하여 배명순은 결국 암으로 죽게 된다. 그렇게 죽게 된다 한들, 이 지난한 유령의 삶은 끝나지를 않는다. 무연고자로 분류된 배명순의 육체는 시체안치실에 냉동되어 기약 없이 방치되고, 그렇기에 그의 영혼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박복한 유령의 처지를 한탄하며 어슬렁거릴 수밖엔 없는 것.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살아서도 살지 못하는. 박복하고 기구한 유령의 삶이란.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이야기를 소비하기엔 죄책감이 든다.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 10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허상의 이야기들이라고 치부하기엔 극장 밖의 현실이 너무나 크게 존재하니까. 배명순이 겪는 다양한 불합리에 몰입하여 삶과 연극의 경계를 잊고 이에 분노하고 있을 때쯤, 익숙한 배우의 목소리로 낯선 대사가 들린다.
“드러운 새끼, 역할을 맡아도 꼭 드러운 것만...”
“유경아, 정말, 미치겠네, 나도. 그 대사 빼고 가자고 연출한테 몇 번을 말했다니까. 우리집 애들이 이 연극 보러오겠어? 몇 번을 애원했다니까. 근데 안 빼주잖아. 오씨 역할도 짜증나 죽겠는데 연출! 어딨어 연출! 나도 이런 대사 안좋아해, 연출!”
자신이 맡은 배역의 비인간성에 불만을 가진 배우가 배역이 아닌 배우 자신의 목소리로 소리친다. 그 성난 목소리들은 박복한 유령의 삶, 그 삶이 불러오는 비극, 그리고 그 비극을 초래한 원인에게까지 닿게 되어, 이토록 힘든 유령에 대한 삶을 만들어낸 신에 대한 원망으로 들리기도, 길을 잃은 연극을 무책임하게 방치한 연출에 대한 원망으로 들리기도 한다. 배우들은 저마다의 불만을 토로하고 지금 자신들이 연기하고 있는 극이 얼마나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에 대해 분노하여, 아마도 ‘위에서 바라보고 있을’ 연출을 향해 허공에 손가락질 한다. 하지만 연출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이 비극적인 삶을 설계한 신처럼.
이렇듯 연극 <유령>은 삶과 연극을 절묘한 지점에서 만나게 하여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이토록 힘든 운명을 주재한, 자비 없는 신에 대한 인간의 원망은 극의 방향성을 잃게 만든 연출에 대한 배우들의 분노와 닮게 되고, 자기 삶 안에서도 존재감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령들은 극 안에서 갈피를 잃은 배우들의 얼굴과 닮게 된다. 배명순은 이지하가 되고, 오사장은 강신구가 되고, 강시분은 전유경이 되듯이. 그렇게 연극 <유령> 안에서 사람은 배우가 되고, 세상은 무대가 되고, 삶은 연극이 되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 연극 유령 프레스콜_3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6/20250615214529_kkfaqeqc.jpg)
사람은 배우, 세상은 무대, 삶이 연극이라면, 이 산만하고 다소 혼란스러운 연극은 극장 밖에 존재하는 거대한 실재를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까. 연극이라는 허구가 잔혹한 현실의 삶에 어떻게 가닿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방법으로 <유령>은 ‘마땅히 사라질 권리’에 초점을 맞춘다. 삶의 모든 과정에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삶의 말미에서라도 확실한 마침표를 찍어주자는, 아주 명료한 위로다. 극의 말미, 연출은 배우에게 문자를 하나 남긴다. 담뱃불로 극장에 불이 붙고, 유령들이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는 것. 그리고 끝. 배우들은 여전히 연출을 비난하지만, 배우의 본분을 지키며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떠오른다. 연극이 끝난다.
연극엔 반드시 끝이 있다. 극장 안에서 진행되는 연극의 시간은 우리를 전혀 다른 곳에 데려가지만, 현실의 시간과 연극의 시간은 함께 진행된다. 그래서 결국 연극은 끝이 나고 우리는 극장 밖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연극 <유령>은 이러한 연극의 필멸을 사용하여 무연고자들의 사라질 권리를 지켜준다. 연극은 살아서도 살 수 없고, 죽어서도 죽을 수 없는. 현실의 잔혹함을 견뎌내고 있는 유령과 같은 존재들을 극과 함께 떠나보냄으로 그 지난한 생을 위로한다.
‘존재하지만 지워진 사람들’은 비단 무연고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라는 무대로부터 부여받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 존재를 지워야하는 누군가의 얼굴은 우리 모두를 닮았다. 시체안치실, 즉 무대에 불이 붙기 전, 유령들은 자신의 시체를 들여다보며 한마디씩 말을 건네곤 마침내 하늘로 오른다. 이 어지럽고 혼란한 연극이자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인 유령들의 차분한 얼굴이 꽤나 큰 울림을 준다. 그 순간, 어쩌면 언젠가의 나도 나와 저렇게 독대하여 마지막 인사를 할 날이 올 수도 있겠다고, 혹은 이미 그렇게 영영 떠나보낸 어떤 모습들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