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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시작되는 요즘, 극장과 공포영화는 현대인의 여름 피서지다. 그러나 서늘함보다는 비에 젖은 상처의 녹진함이 남는 공포영화가 찾아왔다. 6월 6일 국내 개봉한 호주의 쌍둥이 감독 다니엘 필리푸와 마이클 필리푸의 ‘브링 허 백(Bring Her Back)’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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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브링 허 백(Bring Her Back)’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이것은 컬트(cult)가 아니다’라고 알리며 시작한다. 그때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영화를 보고 난 이제는 알 것 같다. 영적인 힘이 공포의 도구로 개입하긴 하지만,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선택이 불러낸 비극이다. 공포영화를 그리 즐기지는 못하는 나이기에 이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긴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무작정 악마적인 공포에 시달리다 끝나는 게 아닌, 인간의 허약한 마음에 원인과 결과가 있는 서사이기에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용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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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호자의 다른 이름


 

투병 중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아버지. 남겨진 이복남매 ‘앤디’와 ‘파이퍼’는 강렬한 트라우마를 안은 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길을 찾는다. 시각 장애가 있는 파이퍼를 알뜰히 챙기는 앤디는 동생에게 좋은 세상만을 여과해 주는 다정한 오빠이다. 아이들은 새 보호자를 배정받아 외딴집으로 향하는데, 그들을 반기는 새엄마 ‘로라’는 어린 딸을 먼저 보낸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 아픔이 고독 속에서 광기로 자라나면서 모든 비극은 시작된다.


영화는 ‘보호자’라는 이름의 이면을 끔찍하게 드러낸다. 보호자는 보호의 대상이 세상의 문턱을 넘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보호자는 검은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버리고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후자라면 아마 위험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정당화된 행위 수단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관철하겠다는 욕망의 표출일 것이다. 보통 특정한 부분에서 힘이나 능력이 모자란 약자들은 보호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변모된 ‘보호’의 폭력에 노출된다.

 

로라, 앤디, 파이퍼, 그리고 올리버는 모두 이러한 보호의 제공자, 대상자,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특히나 로라의 목표를 위한 병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이용당한 올리버의 진짜 이름이 ‘버드(bird)’였다는 점에서, 자유로워야 할 새의 날개를 꺾어버린 아동폭력의 잔혹성을 연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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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흥미로운 것은, 사랑이 집착이 되고, 집착이 폭력이 되는 흐름은 숱한 작품들에서 다뤄지곤 하지만 ‘브링 허 백’은 이 두 과정을 완전히 분리했다가 끝과 끝을 접착시킨다는 점이다. 로라라는 인물의 서사는 ‘딸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새 딸에 대한 명백한 폭력’이 구분된 채 흘러가는데,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두 가지가 맞닿음으로써 폭력을 중단시킨다. 이는 시각 장애를 가져 보호자의 진실한 도움에 의존도가 높은 캐시(로라의 딸)와 파이퍼, 두 소녀를 향해 로라의 광기가 양극으로 흐른 결과로 볼 수 있다. 감독들은 이러한 이원성을 통해 다시금 ‘보호’와 ‘소유’는 완전히 다른 개념임을, 출발점이 같다고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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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마든 천사든


 

‘그녀’를 돌이키기 위해 소환하는 영(靈)은 극 중에서 악마가 아니라 천사라고 불린다. 무고한 이의 목숨을 빼앗을지언정, 이미 죽은 몸을 되살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악마든 천사든, 그걸 만들고 부르는 것은 결국 인간임을 느꼈다. 악마는 악이요, 천사는 선이지만, 인간은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게 본질인 존재다. 남매의 아빠도, 앤디도, 로라도 그러했다. 상황이나 의지에 따라 악마나 천사가 되는 것도 인간이고, 또 악마나 천사를 그렇게 부르는 것도 인간이다.


그리고 선과 악 사이의 놀이는 거짓이 주재한다. ‘자몽’이라고 말하면 무조건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앤디와 파이퍼 사이의 견고한 신뢰를 와해시키는 것이 로라가 자신의 입맛대로 악을 창조하는 가장 쉬운 방식이었다. 동생을 위해 착한 거짓말을 습관처럼 하는 앤디의 특징을 이용해, 로라는 아주 능숙하게 파이퍼가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도록 조작한다. 거짓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다만 거짓을 운용하는 힘의 불균형이 악을 만든다.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나는 AI에 대한 현대의 갑론을박이 꼭 이런 이야기와 닮아있다고 느꼈다. 애초에 AI를 탄생시킨 것이 인간인데, 우리는 그 사실은 쏙 빼놓고 AI라는 기술 자체를 심판하길 원한다.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냐,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냐. 이는 아동 학대와 살인을 저지른 로라와 그 피해자들은 빼놓고, 그녀가 살인에 이용한 영적인 힘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꼴이다. 그것이야말로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따라서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우리의 논의가 찾아가는 결론에 있어서 그렇다. 악마와 천사는 인간이 만들었다. 인간들끼리의 대화 속에서 태어나 인간들이 만든 책에 쓰여있다. 모든 인간에 내재한 선과 악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외재화된 선과 악을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어딘가에 분리해서 투영시키는 것은 늘 오류를 만들어낸다.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이러한 이분법이 얼마나 심각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얼마나 비탄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느낄 것이다.


영화에서 ‘천사’는 형체가 없다. 고통받고 죽어가는 인간들에게서, 혹은 이미 죽은 인간에 깃들어서 무언가가 끔찍하게 표출될 뿐이다. 이 영화의 전체를 불안과 공포로 메우는 힘이 과연 어디서 온 것인가를 되묻게 된다. 영혼이 빼앗긴 듯한 아이의 얼굴인가, 거짓이 조장하는 불행의 예고인가, 거사를 계획하는 광기 어린 냉정함인가. 컬트가 아니다. 인간들의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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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링 허 백’은 공포의 긴장감을 놓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 서사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아픔, 선과 악을 비추기 때문에 특별하다. 선혈과 신체의 망가짐이 주는 시각적인 충격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공감하는 감정의 틈을 준다. 그래서인지 이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 남는 여운은 대뜸 내 앞에 귀신이나 범인이 날 것 같은 무서움이 아니라, 연민과 슬픔에 가깝다.


복합적인 장르가 제시하는 공포영화의 새로운 가능성과, 그 속에 더 복합적인 인간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싶다면 - 여름의 햇빛 한 가운데 숨어있는 영화관을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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