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방적인 거짓말은 기울어진 관계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내기 쉽지만, 속고 속이는 거짓말은 얽힌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만든다. 영화 <붉은 다람쥐> 속 ‘호타’(Jay)는 오토바이 사고로 기억을 잃은 여자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여자친구로 만드는 인물이다. 헤어진 여자친구인 ‘엘리사’의 이름을 따 그녀를 ‘리사’라고 부르고, 4년 째 동거 중인 연인 사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리사’가 ‘호타’에게 일방적으로 속고 있는 듯한 전개가 펼쳐지지만, 이따금씩 나타나는 ‘리사’의 기이한 행동이나 뜻밖의 능력들이 ‘호타’에게 오히려 기만적인 느낌을 준다. 실제로 ‘리사’는 병원으로 실려가던 앰뷸런스 안에서 기억을 되찾았고, ‘호타’의 거짓말대로 행동하며 그의 여자친구인 것처럼 행세를 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그 상황 속에 녹아들기를 택한 이유는 뭐였을까.
그녀의 원래 정체성인 ‘소피아’는 남편 ‘펠릭스’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일방적 관계에서 달아나기 위해 ‘호타’와의 기만적인 관계를 택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속고 속이는 관계이지만 그 속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자신의 상처를 회복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서로를 속이기 보다 자기 자신을 속임으로써 상처 입은 과거를 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소피아’가 보기에 ‘펠릭스’와 ‘호타’는 서로 완전히 대비되는 인물일 것이다. ‘펠릭스’는 ‘소피아’를 지배하려 드는 인물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볼 살을 가위로 자르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자해 행위를 통해 ‘소피아’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려 든다. 하지만 그런 ‘펠릭스’와 비교해, ‘호타’는 그녀에게 다정하며, 바이크를 타지 않고 그녀를 위해 요리를 해주는 등, 마초적인 남성상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소피아’가 모든 기억을 갖고 있음에도 ‘리사’로서 수행하며, 도리어 ‘호타’를 속인 것은 그녀가 ‘호타’를 자신의 상대로 자발적으로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캠핑장에서 만난 가족의 아버지인 ‘안톤’은 매우 가부장적인 남성의 표본인데, ‘소피아’가 그를 참다 못해 뺨을 때리는 장면이나 그의 아내인 ‘카르멘’과 가깝게 지내며 그녀를 챙기는 모습 등을 통해 영화에서 옹호하고 있는 남성상이 ‘펠릭스’나 ‘안톤’이 아니라, ‘호타’와 같은 부류임을 알 수 있기도 하다. 또한 영화는 간접적으로 동성애 관계를 지지하기도 한다. 의사인 '소피아'의 오빠 '살바도르'는 주유소 직원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것을 영화의 후반부에 확인할 수 있으며, 캠핑장 주인인 두 여성 캐릭터 또한 연인 관계로 등장한다. 사실상 영화에 등장하는 그 어떠한 이성애 관계보다도, 간접적으로나마 등장하는 동성애 관계들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관계에 가깝게 묘사된다는 점에 집중해볼 수 있다. 이는 곧 감독의 세계관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과거 스페인의 가톨릭 가치관과 대비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호타’는 자신의 전 여자친구의 정체성을 ‘소피아’에게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그녀와 ‘엘리사’를 겹쳐 보며 영화의 중반부까지도 완전히 과거를 잊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 ‘호타’에게 ‘리사’는 적당히 서로를 속이며 장단을 맞추는 관계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펠릭스’가 등장해 ‘소피아’를 뒤쫓을 때 비로소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후에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녀를 찾아가 만나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 되는데, 결국은 ‘호타’의 입장에서도 ‘리사’의 존재는 자신의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해준 인연이므로, 서로에게 수행했던 역할극이 비로소 두 사람의 상처를 회복하게 하는 치유의 과정이었음이 드러난다.
한편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살바도르’가 ‘소피아’의 친 오빠였다는 점과 두 사람이 이미 전에 스쳐 지나갔던 관계라는 점에서 둘의 사랑이 꽤나 운명적으로 여겨지는데, 그렇기에 서로를 속이던 그러한 기만적인 관계가 용인되는 측면도 없지 않은 듯 하다.
또한 이 영화는 뜬금없는 쇼트들의 연결이나, 초현실적인 액션 등을 통해 다소 현실적이지 못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기본적으로는 스릴러의 문법에 가까운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액션이나 코미디 장르와 유사한 느낌을 주는 면이 있다. 이러한 장치는 영화 특유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하나의 초현실적인 꿈처럼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만약 이 영화가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꿈이라면, 아마도 ‘소피아’의 꿈이었을 것이다. ‘호타’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하던 인물이었기에, 삶에 대한 다른 욕망을 포기한 채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반면에, ‘소피아’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고, 자신이 원하던 동물학을 공부하고자 하던 열망이 남아있는 상태였기에,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소피아’의 바람이 투영된 꿈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가능한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화 속 초현실적 요소들은 영화에 몰입하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장르의 문법이 혼재되어 있으며, 서로 속고 속이는 기만적인 관계가 관객에게도 꽤나 혼란을 주지만, 그 과정을 모두 겪은 두 주인공이 결국 각자의 상처를 회복하고 함께 하는 관계로 나아간다는 결말이 매력적인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