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희망, 아름다움이라는 아노라의 뜻처럼 앞날은 밝으리라. 새하얀 눈처럼 모든 슬픔은 녹아 내리리라. 션 베이커 감독의 비극성이 [아노라]에도 녹아 있지만, 주인공 아노라를 향한 연민으로 이뤄진 결말 덕에 비극이 이어지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간 성노동자를 위한 영화를 제작해 온 션 베이커답게 그들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로 오로지 ‘아노라’의 성장에 초점을 두었다. ‘이반’과의 이혼 위기에서는 피해자로, 부모의 등장부터는 투쟁자로 그려냈으며, 나아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과거의 속박에서도 벗어난다. 그의 전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나 [레드 로켓]에서도 나타나는 삶의 주도권을 더욱 주요하게 표현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 과정은 성노동자의 편견을 배제하기 위한 전개이다. 왜냐하면 영화의 주요 사건은 주변 인물들이 편견어린 시선으로 성노동자인 아노라를 바라보는 탓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에서 아노라가 벗어나 온전히 자신을 바라봐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났을 때 비로소 평범한 여자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또한 이는 노동자와 동일한 조건으로 아노라를 바라보도록 하는 작업이다. 이반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가사도우미, 사탕가게 친구들, 요리사 친구, 주차단속원, 이혼 변호사 등 다양한 노동자들이 이반 패밀리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 노동자가 자본가에 의해 피해를 보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리고 감독은 이들의 홀로 남겨진 모습을 의도적으로 길게 잡아둔다. 이들의 표정은 마치 아노라의 표정과 흡사해 보인다.
사실 이러한 주제는 오프닝에서부터 보여진다. 시작부터 과감할 정도의 스트립 댄스 신에서는 나체의 여성들을 차례차례 보여진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야하다거나 흥분된다는 생각 따위는 별로 들지 않게 된다. 그들의 노동을 보여주는 것이 되려 너무 적나라한 탓에 그저 하나의 ‘노동’ 자체로 보여지며, 일을 마무리할 때쯤 담배를 피자는 시그널을 동료에게 보내는 아노라는 여타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아노라’는 성노동자와 노동자를 구분짓는 영화가 아닌 노동자와 지배자로 나뉘어진 영화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반 패밀리와 다른 이들의 위계질서가 명확하며 그래서 현대계급사회를 다룬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계급 구분은 성노동자와 노동자의 계급 평등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내게 흥미로운 점은 정반대의 시선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나의 사견이다. 이 영화는 다른 의미로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부정적이다.
아노라는 가정사로 어쩔 수 없이 성매매 업소라는 전선에 뛰어든 것으로도 보여진다. 이반이 아노라에게 가족을 묻자 엄마와 그의 남친만을 얘기하고 아빠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부분이 그렇다. 또한 엄마와 별거 중이며 동생을 부양하는 아노라의 모습도 떠올릴 수 있다. 그녀의 가정에는 아빠의 문제가 있었으리라 헤아려볼 만 하다. 게다가 아노라와 이어지는 이반은 깡패이다. 아빠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한 점, 이반의 사랑을 강간으로 인식한 점, 하필 이반이 깡패라는 점에서 아노라의 미래가 밝다고 확신하기 힘들다. 추측컨대 이는 성노동자(노동자)의 되물림을 의미하며 성노동자를 사회의 피해자로 피력하는 셈이다. 션 베이커의 전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엔딩을 꿈으로 해석한 몇몇 평론들을 떠올려 볼 때 아노라의 꿈은 정말 한낱 꿈일 지 모른다.
되새겨보면 성노동자의 불운한 가정사는 클리셰에 가깝다. 그리고 성노동자를 편의적이고 피해자로만 표현했다는 점에서 한계도 명확하다. [아노라]는 스스로 클리셰를 답습한다. 하지만 신데렐라식 이야기를 현실을 담은 비극성으로 부정하는 결말로 한계점을 교묘히 빠져 나간다. 입체적이고 영리한 영화인 셈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가능성은 정말 가능성에 불과하다. 당연히 나 또한 그간 온갖 아픔을 겪은 아노라가 행복했으면 한다. 그리고 아마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높다. 그녀의 눈물이 증거다. 그 눈물의 의미는 영화 내에서 받은 멸시에 대한 서러움이겠지만, 또한, 훨씬 전부터 두려워한 '사랑 받을 만한 자격'에 관한 의문을 이고르의 포옹으로 잠시나마 잊고 누리는 안도감이기 떄문이다. 둘이 눈물을 나누는 신을 굳이 영화의 엔딩으로 넣은 션 베이커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녀는 나로서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며 더욱 강한 자아를 형성할 테다. 사실 다른 성노동자는 몰라도 아노라가 영화 내에서 행복해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두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확실한 하나는 이 영화가 스트리퍼를 비롯한 성노동자를 향한 시선을 뒤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폭죽 터지듯 흘러나오는 노래들과 떠들석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들의 연속을 지나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환호가 아닌 혼돈과 쓰라림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고난을 이겨내지도 버텨내지도 못하고 그저 지나온 아노라가 터뜨리는 울음은 눈을 감아도 화면이 검은색이 돼도 메아리처럼 들린다. 그렇게 점차 마음이 머리를 지배할 때, 아노라를 원없이 응원하게 된다. 참으로 호소력이 짙고 강렬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