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민지 공공 기념물
기념물은 기존의 고전주의 테제가 무너지고, 근대 국가가 성립되면서, 국가권력의 등장을 확인시키기 위해 등장하였다. 이는 식민지 시기의 기념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식민지 기념물은 단순한 국민국가 혹은 근대국가의 기념물과는 다른 측면을 띄지 않을 수 없는데, 식민지배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면서도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라는 한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기념물을 통해 타국에 대한 제국의 우위를 내세우고 이를 통해 타국인으로 하여금 자발적 복종을 유도한다. 그 결과 기념물은 도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에 반복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지배층이 선택한 이념을 전달하며 특정한 이념을 의식에 각인하여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만든다.
이 때, 공공 기념물은 각 나라별로 약간의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이런 양상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기념물과 일본 제국의 기념물의 양태는 가장 크게 드러난다. 그래서 앞으로 필자는 이 둘의 기념물의 차이를 고찰하고 이에 대한 이유를 살필 예정이다.
2. 프랑스와 일본
i) 프랑스
우선 베트남에서 자주 세워진 공공 기념물은 크게 두 가지의 유형을 가진다. 프랑스 그 자체를 상징하는 기념물과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프랑스인의 기념물이 있다. 이를 통해 프랑스 기념물은 무력적인 지배를 강조하기보다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프랑스 자체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이다. 이 조형물의 주요 모티브는 ‘마리안(Marianne)’이라는 여인상인데,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정신과 프랑스공화국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경우에는 무력적인 수단을 통한 강압적 면모보다 자신들의 정치 체제의 우월함을 선전하는 데에 더욱 초점을 맞추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전략을 통해 타국의 정치적 ‘미개함’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인도차이나의 수호자 프랑스(La France Protectrice del’Indochine)> 역시 프랑스 그 자체를 상징하는 면모가 드러난다. 이 조형물에서도 마리안의 도상이 등장하며, 마리안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안남, 중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상징하는 4명의 인물이 각각 자기 지역에서 나는 생산품을 수호자에게 바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조형물 좌, 우에는 커다란 얼굴이 있는데, 베트남을 가로지르는 두 강인 홍강과 메콩강을 상징한다. 이렇게 <인도차이나의 수호자 프랑스>를 통해 프랑스 식민정부가 인도차이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마치 수호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베트남인들을 타자화하는 고도의 전략을 차용하고 있다.
이런 수호자로서 프랑스를 강조하는 면모는 영웅상에도 드러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폴 베르 조각상>으로, 폴 베르는 1886년 안남과 통킹의 총독(Resident General, 1886년 1월 ~ 1886년 11월)을 역임한 사람인데, 폴 베르는 외투까지 걸친 완전한 복장을 한 채 환검호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한 베트남 소년이 등장하는데, 폴 베르의 발치에 엉덩이를 땅에 대고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며 폴베르를 올려 보고 있다. 그리고 폴 베르는 왼손을 펴 앉아 있는 베트남 소년의 머리를 덮어 주는데, 이를 통해 베트남을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로 묘사하여,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한 존재인 양 등장하며, 이를 통해 프랑스는 식민지배가 왜 정당하지를 잘 설명한다.
ii) 일본
한편, 일제 시기의 기념물은 위의 프랑스와는 다른 양태를 지닌다. 일본은 보다 군사적이고 무력적인 모습을 띈다. 특히 이런 측면을 강조하는 기념물로, 바로 무기형 기념물과 개선문형 기념물 그리고 오벨리스크형 기념물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일본의 식민통치 기념물은 프랑스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취한다. 당시 프랑스의 경우에는 굉장히 문화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일본은 굉장히 폭력에 기초한 작품을 자주 만들어 냈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상황과 큰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설명하기에 최근에 나오는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한 인식을 조금 살피면 좋을 듯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은 바로 조선을 정벌할 자신감이 없었다는 주장이 여럿 제기되는 실정이다. 흔히 교과서에서 일본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서 급격하게 주춤하다가 청일 전쟁을 기점으로 청나라를 물리치고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의 야욕을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기술하나,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일본이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편이었고, 역시 당대의 일본의 국력이 너무 지나치게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최근의 청일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전과 달리 청과 일본의 완전한 국력 대결이기보다 차라리 리홍장 군벌과 일본 간의 전쟁으로 보는 시각이 등장하였고,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역시 일본이 완전히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기에는 희생자가 너무 많았으며 당시 러시아 내부의 문제에 의해 상당히 와해된 상황임을 고려해야한다고 본다. 더구나 일본이 과연 조선을 완전히 지배할 만한 역량이 있었는가에 대해 일본 의회 내부의 설왕설래를 볼 때 완전히 자신감을 가지고 조선을 지배했다고 보기 어려운 지점이 많다는 것이 학계 일견의 논의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군부 정권이었던 데라우치의 승리로 한반도 전면 지배가 가능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의회의 내부에서도 이토를 중심으로 하는 점진적 한반도 지배에 대한 견해가 나름 세를 얻고 있었다. (물론, 이는 안중근의 사살로 급격히 세가 기우는 면모를 보인다.) 여하튼 이렇게 완전한 자신감을 가지고 한반도를 지배할 수 없었던 일본은 보다 군사적이고 무력적인 면모를 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영국과 프랑스가 새로운 통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자신들의 컨텐츠를 가지고 식민지 지배에 활용을 한다면, 일본은 지난 2000년간 문화적 우월감을 가져왔던 조선을 지배함에 있어 새로운 획기적인 컨텐츠를 통해 지배를 하기보다 오히려 무력에 의존하고 군부에 의존하여 통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국가에 대한 완전한 우위를 보이는 듯하지만, 역설적으로 당시의 일제가 자신들의 통치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한 모습으로 읽힌다. 실제로 초기 일제는 상당히 미숙한 모습을 면면에서 보이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3.1운동 당시 이완용이 3.1운동에 취했던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이완용에게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하는데 이완용은 이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렇다고 일제 상부에 이를 보고하지는 않는다. 이는 물론 기회주의적인 이완용의 면모를 드러내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당시에 소위 매국인사들이 일본의 통치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쌓여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실제로 당시 소위 을사오적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 후작인 이완용을 제외한 4명이 모두 겨우 자작에 그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당시의 일본 총독부의 미숙한 정치 운영을 보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정치력 부재를 드러낸다.
이런 정치적 자신감의 부재는 결국 자신의 군사적 측면을 오히려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그렇게 군사적인 면모를 과시하여야만 비로소 국가의 시스템이 돌아 갈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기념물이 마치 하나의 권력과 권위로서 등장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읽힐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은 겨우 40년도 채 지배하지 못하고 조선에서 철수를 해야 했으며, 이는 스스로의 통치의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이순, 「제국일본의 식민지배와 공공기념물」,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4(2017), pp7-34
우신구, 「식민지 수도 하노이의 제국주의적 경관」, 『서울학 연구』, 2016,77-120
당시 한중일 관련 이야기는 필자가 직접 연구자에게 들은 것으로서 다른 논문을 참조하지 않았음을 주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