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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박제된 기억에 대한 잔잔한 단상 [도서]

오사키 요시오, 《파일럿 피쉬》

by 한나라 에디터
2020.05.0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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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욱, 뚜-욱

 

 

이 소설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어항을 바라보며,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잔 속 얼음이 달그락 거리고, 멍하니 앉아 공상에 잠기는 그런 느낌을 말이다. 오랜만에 내가 종종 행하는 작은 모험에서 꽤 오래 동안 기억에 새길 책을 찾았다. 나는 자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서가를 돌아다니며 책을 뽑아들곤 한다. 고전이나 타인의 서평을 통해 있는 책들 대신 외부의 정보 없이 우연히 집어든 책이 가슴 깊이 남는, 잔잔한 감동을 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횟수는 많지 않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행운을 끊을 수가 없어, 나는 늘 이 사소한 모험을 감행한다.


이 소설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겉으로는 일주일동안 야마자키가 겪는 일들을 묘사하지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이 과거에 대한 단상이 맞물리면서 꽤나 많은 메시지를 던지는 묵직한 소설이다. 소설은 야마자키 친구의 한 마디로부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에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자신의 꼬리를 물려 이리 저리 뱅글뱅글 돈다'는 그 한 마디.


야마자키는 자신의 일부인 꼬리를 잡기 위해 빙글빙글 제자리를 맴도는 이 행위를, 기억을 더듬어 과거의 시간과 닿으려는 시도와 동일시한다. 기억 역시 나를 구성하는 나의 일부이다. 하지만 기억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존재 자체는 생생하게 살아있더라도 기억은 과거라는 시간에 박제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를 사는 나와는 닿을 수 없다. 그저 눈앞에서 아른거리기만 할 뿐이다.


이 소설은 그런 기억을 더듬어 과거에 닿으려는 행위로 온통 뒤덮여 있다. 순간순간 현재의 삶으로 새어 들어오는 기억의 조각들로 인해 과거를 더듬고 음미하는 일, 그리고 그 과거가 쌓여 만들어진 현재를 다시 과거로 회상하는 일, 이 소설은 이러한 기억과 시간의 순환을 담담하고 은은하게 묘사한다.


10년 만에 갑자기 걸려온 첫 사랑 유키코의 전화, 갑작스럽게 잡아버린 스티커 사진 약속, 직장 상사 사와이씨의 죽음,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가나의 존재, 가나로 인해 만났지만 야마자키의 현재를 같이 보내는 나나미, 어렴풋이 묻혀있다 가나로 인해 다시 드러난 와타나베 씨의 존재. 이 모든 것들이 과거와 현재가 기억이라는 연결고리로 얽혀서 만든 소설의 조각들이다. 죽음, 섹스, 사랑, 기억, 감정, 과거, 추억, 닳아감, 관조, 물고기. 새벽빛에 빛나는 고요한 수조를 바라보듯 이 소설은 담담하게 이 묵직한 주제들을 묘사한다.


가장 압축적으로 이 소설을 묘사하는 구절은 수조 속 세상을 기억과 시간의 관계에 비유하는 대목이다.

 


수조는 어둠 속에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도 수족관의 물은 갓 닦아 놓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테트라와 코리도라스들이 무질서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물속에서 한가롭게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들. 손을 뻗으면 바로 손안에 잡힐 거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과 비슷할지 모른다. 과거의 일들은 작은 물고기처럼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가슴 속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아무리 그리로 손을 뻗어도 투명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라는 물이 엄연히 존재해서, 퍼 올리고 또 퍼 올려도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려 두 번 다시 잡을 수가 없다.


-  p.116


 

물은 투명해서 수조 속 세상과 수조 밖 세상이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물은 시간과 같다. 시간 역시 투명해서 눈앞에서 떠도는 과거의 조각들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만든다. 하지만 명백하게 시간과 물은 과거와 현재를, 수조 밖과 수조 안을 가르는 존재들이며, 그저 끊임없이 아른거리며 사람들을 유혹할 뿐이다.


하지만, 닿을 수 없기에 기억은(혹은 추억은) 아름답게 박제된다. 시간이 지나면 힘든 일도 웃으며 말하는 날이 오듯이, 시간이란 그렇게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기도 한다. 닿을 순 없지만 연결되어 있는 과거를, 야마자키는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자신의 과거를 구성하는 유키코, 사와이 씨, 와타나베 씨, 가나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면서도 과거에 매여 현재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저 때때로 이들을 수조 속 물고기 보듯 고요히 관조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뿐이다.

  


사람은 한번 만난 사람과는 두 번 다시 헤어질 수 없다. 인간에게는 기억이라는 능력이 있고, 따라서 좋든 싫든 그 기억과 더불어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 어딘가에 그 모든 기억들을 담아놓는 거대한 호수 같은 곳이 있고, 그 밑바닥에는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무수한 기억들이 앙금처럼 쌓여있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잠에서 막 깨어 아직 아무 생각도 없는 아침, 아주 먼 옛날에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 기억이 호수 밑바닥에서 별안간 두둥실 떠오를 때가 있다.


그리로 손을 뻗는다.


호수에 떠 있는 보트에서 손을 뻗는다. 그러나 보트에서 호수바닥이 훤히 보여도 그곳에 손이 닿지는 않듯이, 앙금으로 가라앉은 과거는 두 번 다시 손에 쥘 수 없다.

 

제 아무리 퍼내고 또 퍼내도 손에는 덧없는 물의 감촉만 남을 뿐, 힘껏 움켜쥐려 하면 할수록 그 물은 세기를 더하며 손가락 틈새로 새어나가 버린다.

 

그러나 손에 쥘 수는 없을지 몰라도 기억은 흔들흔들 아스라하게,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내 안에 존재하므로 그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 p.11


 

우리는 흔히, 시간에 날개가 달렸다는 표현을 쓴다. 그만큼 시간은 빠르게, 무방비하게 흘러간다는 뜻일 테다. 시간은 과거를 미화시키지만, 한편으로 현재를 두렵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행복한 순간, 이 행복이 어느 샌가 과거가 되어 닿을 수 없는 박제된 기억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당연하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씁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치이다.

 

 

시간은 이렇게 무방비하게 흘러간다. 행복한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너무나 무방비하다. 그리고 흘러가 버린 시간은 돌연 소리를 잃어버린 이 수조처럼 마음속 깊이 쌓이고,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겹겹이 덧쌓여서 급기야 손으로 잡을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나이 먹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그렇게 쌓여만 가는 그러면서도 두 번 다시 손이 닿지 않는 것들이 늘어가는 게 두렵다. 분명 지금 이 순간처럼 잊을 수 없는 행복하고 조용한 시간 하나 하나가.......

 

- p.188



이 소설은 깊다. 잔잔하고 고요하지만 가슴 속에 큰 파문을 만든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음에 와 박히는 소설을 찾았다. 시간에 대하여, 과거에 대하여, 그리고 인생에 대하여 사색하고 관조할 수 있어 마음이 뿌듯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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