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의 낭만, 나의 행복 - 타샤의 말

글 입력 2018.02.1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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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 없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위염, 장염, 피부염, 고열과 대상포진, 2018년이 된 후로 앓았던 병들이다. ‘유리 몸’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다양한 질병을 앓아왔건만, 그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통증들이 무겁게 다가왔다. 온 몸 곳곳의 염증은 곧 살아가는 것에 대한 염증처럼 느껴졌다. 스물 셋, 스물 넷, 스물다섯, 스물여섯. 시옷받침이 들어가는 순간 중반이 된다던데. (인생을 더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우습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준비 없이 스물 셋을 맞이한 채 20대 중반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지금이다.

 무기력증에 빠진지는 꽤 오래 되었다. 반년 쯤 되었나, 별다른 계기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스스로를 ‘쾌락 주의자’라고 설명할 만큼 좋아하는 것들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게 권태롭게 여겨진다. 억지로나마 무언가를 좋아해보려 노력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20대 중반의 현실에 부딪혔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스물 셋은 참 이상한 나이다. ‘에이, 스물 셋이면 아직 어리지’ 와 ‘스물 셋이면 슬슬 취업해야지’ 그 간극에 있는 나이. 학교 성적과 토익 성적, 외국어, 대외활동, 자격증, 포트폴리오, 취업, 취업, 취업. 걱정인지 오지랖인지 모를, 머리가 커질수록 잦아지는 주변의 관심에 더해 스물 셋의 나는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커져가는 불안감도 나의 무기력증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시간이 더욱 빠르게 흘러갔다. 도저히 그 시간을 붙잡을 수가 없었으며 잡을 의욕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 우울한 이야기만 했나,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 ‘타샤의 말’이라는 책 속 타샤 튜더의 삶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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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샤 튜더는 산골 땅을 마련하여 정원을 가꾸고, 앤티크 드레스를 입고 구식 무쇠 스토브로 요리를 하며, 19세기의 생활양식대로 살아가고 있다. 정원에 피어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차 한 잔에 여유를 느끼는 그녀의 삶에는 딱딱하기만 한 우리의 ‘스펙’과 ‘취업’-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타샤 튜더는 그렇게 그녀만의 이상과 철학을 따라, 오래전부터 그려온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책 속에서는 그녀를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소개하고 있다. 행복이라, 그 의미를 떠올려본지가 언제인지. 단어 자체가 어색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명확하게 ‘그녀의 행복’을 따라가고 있었다. 고요하면서 단순한 자연의 삶, 누군가에겐 괴상하고 기이해보일 수 있는 삶은 그녀가 구체적으로 그려온 ‘그녀의’ 삶이었다. 그녀만의 철학은 엄청나게 대단하다거나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권태로운 나의 삶에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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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독을 만끽한다. 이기적일지는 모르지만, 그게 뭐 어때서. 오스카 아일드의 말마따나 인생이란 워낙 중요한 것이니 심각하게 맘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중략) 해마다 별이 한 번만 뜬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생각이 나는지. 세상은 얼마나 근사한가!

 
 나는 이상하게도 ‘소속감’에 집착해왔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았으면 불안했고, 그 불안함을 못 견뎌 타인에게 더욱 집착하곤 했다. 게으르면서도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그 집착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이었는가를 깨닫고 있다. 아니, 의미 없다기 보다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야하나.
 
 소속감에 집착할수록 타인으로 부터의 상처가 더욱 깊게 느껴지곤 했다. 왜 굳이 노력해서 상처를 받았었는지, 내 인생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좋을 텐데. 타샤의 말처럼 역시 인생은 고독해도, 이기적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


가끔 건초를 던질 때면 한여름의 헛간 냄새가 풍긴다. 창문과 판자벽의 틈 사이로 해가 들어, 뿌연 공기 중에 빛줄기를 만든다. 하지만 나는 겨울에 여름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가 잘 말했다. ‘5월의 새로운 환희 속에서 눈을 그리지 않듯, 크리스마스에 장미를 갈망하지 않는다네.’ 바로 그렇다. 모든 것에 제철이 있는 법


 침대에 멍하니 누워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많다. 그때는 좋았지, 그때가 제일 행복했지-이러한 생각이 내 머릿속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생각 없이 과거에만 얽매여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의미 없이 흘러가는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되돌아볼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있다. 아직 마주하지 못한 나의 행복을 위해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이내 들기 시작했다. 과거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 모든 것에는 제철이 있는 법이니까, 지금의 행복도 곧 나에게 찾아오겠지.


사람들은 날 장밋빛으로 본다. 보통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다. 내 본모습을 못 보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우리는 달과 같아서, 누구나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어두운 면을 지니는 것을.


 가장 위로가 되었던 타샤의 철학이다. 바쁜 세상 속에서 나만 멈춰있는 기분이었다. 나만  준비가 덜 되었고, 나만 어딘가 결핍되어있고, 나만 어떠한 이유 때문에 우울하고, 나만, 나만, 나만. 이러한 생각에 불안함이 도통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달의 뒷면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왜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살았을까, 누구나 자신만의 고충과 아픔을 갖고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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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좌우명이 ‘낭만’이라 말하는 래퍼를 본 적이 있다. 낭만, 얼마나 멋지고 유려한, 감성적인 단어인가. 오글거리긴해도 그 이후로 줄곧 나의 좌우명도 낭만-이었다. 타샤의 인생을 읽는 내내 잃어왔던 나의 낭만을 되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취업 언제할거니?’, ‘무슨 일 할 거니?’, ‘취업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니?’

 내 삶을 권태롭게 만들었던 주변의 질문들은 언젠가는 마주해야할 현실이다. 주변의 지나친 관심이 내 무기력증의 원인이라고 말해왔지만, 그건 사실 핑계에 더 가깝다. 현실에 안주하기 이전에 나의 행복과 낭만이 무엇인지 잊지 않으면 되련만. 좋아하는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시간이 아깝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나의 낭만과 행복을 위해, 모든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려 한다.





 포진으로 뒤덮인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간만에 외출을 감행했다. 며칠 새 따뜻해진 날씨에 왠지 모를 나른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기분 좋은 외출이었다. 2주만에 가진 친구와의 약속이었다.

 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타샤의 말'을 건네주었다. 삶의 의미를 찾으라거나, 행복의 의미를 묻는다거나, 하는 거창한 의도는 없었다. 단지 아기자기하면서도 소소한, 고전적인 것들을 좋아라 해서, 특히나 예쁜 것을 좋아하는 친구여서, 그런 이유였다. 책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친구를 보니 분명, 행복했다. 행복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여지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들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타샤의 말처럼, 우리 손이 닿는 곳에 행복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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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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