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빈 : We are the clay, you are the potter (~11.14)

글 입력 2014.10.25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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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안내]
 
-일정: 2014.10.16 ~ 2014.11.14
-시간: 월~금 11:00-19:00 / 토요일 11:00-18:00 / 일요일 휴관
-장소: 갤러리 살롱드에이치
-가격: 무료
 
 
 
 
[전시소개]
 
<강상빈의 무정형 아이콘 만들기>



강상빈 작가의 이번 전시제목은 “We Are The Clay You Are The Potter“(2014)로서, 지난번 개인전 <심판의 날과 아빠와 베개와 담요를 만든 하나님>(2013)과 같이 종교적인 내용이 다뤄질 것을 예측할 수 있다. 문맥 없이 하나의 문장만으로는 도자공에 대한 이야기이겠거니 할 수도 있지만, 실은 성경에 나오는 구절로서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라고 구약성서에 번역되어 있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강상빈의 예술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화두는 ‘믿음’으로, 지난 전시에서는 이를 종교와 우화를 통해서 다루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종교에 한정 지어 성상과 악마의 이미지를 통해서 다루고 있다고 보인다. 종교에서 믿음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불가분의 관계이며, 따라서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서 믿음에 기반을 둔 종교를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왜 그는 믿음에 대해 질문하며, 그가 문제시하는 믿음은 무엇이며, 또한 이를 종교적인 이미지를 통해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를 따라가 봐야 할 것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특별히 ‘아이콘(종교적, 인물, 대상적)’들이 어떻게 시대적으로 다르게 반영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떻게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구축되는지, 그리고 시각예술을 통해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탐구하게 되었다.”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해진 ‘아이콘’은 사실 성상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아이콘’은 이미 단어 자체로도 본래의 가치는 약해졌고 쓰임은 가벼워졌다. ‘성상’에서 ‘우상’으로, 그리고 이제는 그저 시대나 문화를 반영하는 ‘유행’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될 정도이다. 의미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성상을 뜻하던 시대의 아이콘은 이제 종교의 상징적 가치보다 인본주의의 예술적 가치가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인식하고 ‘아이콘’에 ‘종교적’ ‘인물’ ‘대상적’ 이라는 부연을 붙이는데, 이를 아우르는 차원에서 그 의미만을 보자면, ‘상징’을 말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상징은 주체들의 합의에 의해 의미에 적합한 형식으로 결정된 시대적 산물로서 성상이 그렇듯 지역과 시대에 따라 의미가 바뀔 수밖에 없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떻게 아이콘의 지위를 얻으며, 나아가 시대나 문화처럼 외적인 요인에 의해 어떠한 의미변화가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물론, 대답은 ‘믿음’일 테고, 믿음의 정도와 목적에 따라 형태의 변형이나 의미의 변화가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가를 따져보면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이에 대해 우선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자발적이고, 다른 하나는 비자발적으로 생긴다. 전자는 상징을 합의하는 주체에 모든 ‘나’가 포함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경우이다. 합의에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나’가 포함되지 않을 경우는 지배층에 속한 소수의 ‘나’에 의한 것이므로 보편성이 없기 때문에 힘에 의지하게 된다. 여기서 힘은 이미 근거가 보편적이지 않으면서 비자발적인 상대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폭력을 수반한다. 상대는 이러한 힘에 대한 공포로 인해 비자발적인 믿음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자체가 모순되고 부정적이다. 따라서 맹목적인 믿음으로 변형되어 자발성을 획득한다. 전자는 종교이전의 믿음으로 신화와 연관이 있고, 후자는 상징과 분리된 인간에 의한 믿음으로서 종교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상징의 대상만 바뀔 뿐, 현대 사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랄랑드는 『철학사전』에서, 신화를 “우화적이고 대중적인 기원을 가진 비사색적인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신화의 기원은 대중이며, 우화적이고 비사색적, 즉 비이성적인 영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신화는 상징의 성격을 띠면서 자연의 힘을 동원하는 개인적인 존재의 형태이며, “우리는 신화 속에서 하나의 사상이나 교의가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거기서는 상상력이 발휘되고 환상과 그 아래에 감추어진 진리를 혼합하는 시적이고 종교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귀스도르프가 자신의 저서 『신화와 형이상학』에서 인용한 문구이다. 그는 고대의 형이상학과 종교의 시대를 지나 근대 이성의 합리주의로 인해 발생한 현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화적인 의식을 요청한다. 우리시대는 자연과 분리된 채 일방향성을 지닌 맹목적인 믿음에 의해 우리 시대에 유혈이 낭자하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고, 이러한 전쟁과 같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한 공포와 함께 어떤 질병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서운 것에 대한 공포까지 만연해 있다. 매체는 위정자들에게 기성 권력에 순응하는 이데올로기를 부과하면서 여론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조작된 정보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감정과 감동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자신들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다. 이성에 의해 형성된 믿음의 결과이다. 따라서 그는 이성이 시작되기 이전의 상상력, 정렬, 감성에 기반을 둔 신화적 의식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상빈 작가가 믿음을 작업의 주제로 삼으면서 우화에서 종교로, 그리고 대중문화의 아이콘까지 다루는 태도를 귀스도르프의 분석과 제안에 연결시킬 수 있다.

강상빈의 작업주제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의 발생과 변화, 그리고 사회적인 연관성을 추적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성에 의한 믿음을 비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을 위해서 그는 익숙한 사물과 상징들을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쉽게 접근하게 한 다음, 인식을 교란시킨다. 그의 작품 앞에서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틀리게 본다. 여성마네킹에 예수의 전형적인 오브제를 부착한 ‘Jesus’(2012)나 ‘Sleeping Daddy’(2013)가 대표적이다. 인식은 믿음에 기인하는데, 우리가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들로 인해 잘못 인식하게 된다. 지성주의는 이러한 인식의 오류를 감각이나 상상력의 탓으로 돌렸다. 감각은 원래 혼미해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서 명료한 이성이 아닌 허황된 상상력이 작동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성이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으로 감각정보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추상하거나 구축해서 판단한 결과이다. 따라서 판단의 오류는 자기 안에 있는 정보로만 반성하는 이성 자신이다. 두 번째 방법을 위해서는 익숙한 것을 녹아내리게 하거나 변형시키는 것이다. 2008년부터 포르셀린으로 작업하고 있는 연작을 들 수 있다. 재료의 특성에 따라 일그러지고 흘러내리는 듯 만들어진 형상들은 거울을 통해서만 해골과 같은 숨겨진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는 재료의 선택이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원시미술과 연관시켜 해석해 볼 수 있다. 원시미술이 예술의 영역으로 의미를 지니고 유입된 시기는 1930년대로서, 구석기 미술과 부족미술 모두를 포함한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조르주 바타이유는 자신이 편집자로 있던 《도퀴망》(19030)에 실은 비평글 「원시미술」에서 원시미술에 드러난 욕구는 형태의 구성과 같은 재현이 아니라, 파괴의 즐거움과 무언가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유희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따라서 제작자의 태도는 형태를 만들어 내는 법칙을 찾는 것이라기보다, 그런 형식을 거부하고 ‘무정형(inform)’을 추구하는 것이고 말한다. 언뜻 보면 무정형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이러한 형식 아닌 형식은 경계를 없애면서 인식의 영역을 감각의 층위로 다시 열어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상빈은 이성에 의한 믿음을 비판하고 경계를 없애는 방식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작품의 주요 소재는 ‘Eddie The Head’(이하 ‘에디’)이다. 브리티쉬 헤비메탈의 대표적인 그룹인 ‘아이언메이든’의 앨범 커버에 등장한 이래, 80년대를 풍미한 헤비메탈의 아이콘이 되었다. 사운드에서부터 내용과 무대매너에 이르기까지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악마적인 성향이 짙은 장르로서 종교와 상반되는 영역이고, 에디는 특히 전형적인 악마의 형상이다.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을 보면, 고전회화의 한 예로 18세기후반의 궁중화가였던 고야의 덜 유명한 작품―고전회화의 전형적인 양식을 띤 예로 사용하였기에 여기서 작품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의 부분을 차용하여 그린 <7th Sons>연작과 그 옆에 종교적인 아이콘의 전형인 수도승의 옷과 시각적인 분위기를 가중하기 위한 잡다한 오브제들로 이루어진 , 팝의 제왕 마이클잭슨과 그의 원숭이를 소재로 제작되었던 팝아트의 제왕 제프쿤스(Jeff Koons)의 작품 (1988)을 차용해서 점토로 만든 연작, 브랑쿠시의 <잠이 든 뮤즈>(1910)를 패러디한 의 작품들에 전부 ‘에디’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유일하게 작가 자신의 부모님을 연상케 하는 상징으로서 외국서적과 계란껍질로 구성한 만이 오브제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에디’의 얼굴이 없는데, 이 작품 또한 의 근원으로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다.

정리해 보면, 작가는 일상적인 오브제나 익숙한 양식을 사용하여 인식의 오류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이성에 의한 믿음으로 본다. 그렇게 형성된 믿음은 상대를 적대시하고 비자발적으로 예속시키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여기에는 작가의 믿음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깔려있기도 하지만, 오히려 작품을 통해 믿음의 긍정성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객들이 자기만의 생각과 관점으로 접근하고,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래서 작업을 전개하는 방법으로써 경계 없애기를 취하고, 그가 소재로 취하는 부정형적인 형상들이 노니는 틀로서 우화, 종교, 상징, 상상물 등을 동원하면서, 궁극에 신화적 의식을 회복할 것을 권한다. 신화적 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믿음은 대중에 의한 자발적인 원동력이고, 자연에 순응하는 보편성에 의한 믿음이다. 익히 알다시피 신화에서는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이 모두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에 기반을 둔 의식의 차원에서는 성상과 악마상의 경계가 없고, 따라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 또한 없어진다. 나아가 그의 작품과 권유를 통해 우리는 반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성에 의한 인식의 차원을 확인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믿음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게 될 것이다. ■ 글. 박순영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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