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말,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도망치듯 찾은 곳은 서울시립미술관이었다.
입장료 없이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유영국의 작품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아침 일찍 미술관에 다다랐다. 강렬한 원색의 빨간 포스터가 반겨주는 전시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는 유영국의 지나온 삶을 찬찬히 짚어보며 관람객들을 전시장 안으로 이끈다.
그는 1937년 일본 도쿄문화학원 유화과를 졸업했고, 해방 후인 1948년 신사실파전에 참여했으며, 1956년에는 모던아트협회의 동인으로 활동하는 등 화가로서의 길을 이어갔다. 1959년 이후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주최 한국현대작가전, 이스파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한편, 1964년부터 1970년 사이 네 차례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번 전시의 주제가 ‘산’인 만큼, 놀랍게도 대부분의 작품은 자연, 그중에서도 산을 모티프로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초반부에는 다양한 색감과 형태가 한 캔버스 안에서 펼쳐지며 추상미술 특유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점과 선을 거쳐 입체적인 면을 평면 위에 구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그의 방식이 점차 화가만의 고유한 화풍으로 자리 잡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공간 연출과 맞물려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다시 밝아지는 공간을 차례로 지나며 관람객은 화가의 삶을 따라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어두운 공간 속에서 오롯이 비춰지는 작품들은, 화가가 서구 아방가르드 미술과 유년 시절 접한 어촌 풍경 등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을 어떻게 재해석했는지를 보여준다. 산과 바다가 맞닿은 지역에서 나고 자란 그의 배경 때문인지, 그림 너머의 자연은 때로는 바다처럼 담대하게, 또 때로는 산처럼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유영국은 김환기, 이응노 등 동료 화가들이 국외로 미술 공부를 떠날 때에도 한국에 남아 자신의 작업을 이어갔으며, 교수직마저 내려놓고 오롯이 그림에만 몰두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이 왜 늘 같은 대상을 그리는지 묻자, 그는 피카소를 언급하며 자신은 다방면에 재능을 지닌 화가가 아니기에 평생 나고 자란 공간에서 가장 잘 아는 대상인 ‘산’ 하나를 그린다고 답했다.
이처럼 유영국의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는 폴 세잔이 사과를 통해 대상의 구조와 본질을 탐구하고, 생빅투아르 산을 집요하게 화폭에 담아냈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표면 너머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던 두 사람의 세계관은 단순히 ‘추상미술’이라는 이름으로만 묶기에는 아쉬울 만큼 오늘날에도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울림을 전한다.
이어지는 밝은 공간에서 관람객은 어느덧 유영국과 함께 산의 정상에 올라선 듯한 기분을 느낀다. 고유한 철학으로 완성된 작품들은 그의 예술 세계가 절정에 이른 순간들을 차분히 보여준다.
대담한 색채와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도형의 구성, 특히 붉은 배경 위에서 산의 형상이 중심을 향해 수렴하는 작품은 보는 이의 마음에도 확장의 파동을 일으킨다. 화가도, 그리고 우리도 이미 알고 있었던 내면의 자연이 그림을 넘어 하나의 소통 수단이 되어 시공간을 넘나드는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이후 유영국은 여덟 차례의 대수술과 반복되는 입퇴원 속에서도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 조수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의 손으로 캔버스를 마주하며 예술을 숭고한 경지로 끌어올렸다. 강렬한 붉은색으로 자연의 에너지를 표현했던 이전과 달리, 노년기의 작품에서는 푸른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보다 잔잔한 자연을 담아냈다.
"새로운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화가 유영국은 서구 미술의 영향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하며 평생 산을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오른 그는 화가는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철학과 함께 우리 안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본질을 화폭에 담아냈다. 전시를 모두 둘러본 뒤에는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며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뿐만 아니라 출구에 마련된 그의 생애를 담은 영상까지 함께 감상해 보길 권한다.
화가 유영국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역대 최대 규모로 마련된 전시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는 2026년 10월 2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