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은 흔히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언급된다. 이러한 수식어는 때때로 그의 작품을 과거형의 예술로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 2026년에 유영국을 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는 흥미로운 방식을 택한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역대 최대 규모의 회전인 이번 전시는 작가의 미술사적 성취를 나열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와 경제 성장기를 거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예술가의 삶을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
무엇보다 전시 구성 방식이 인상깊었는데, 이번 전시는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는 전통적 회고전 형식을 탈피한다. 유영국에게 결정적인 순간인 1964년에서 출발해 시간을 역행하는 구조를 택한다.
왜 1964년에서 시작하는가
산, 1964, 캔버스에 유채
1964년, 48세 유영국은 생애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모든 그룹 활동을 중단하고, 2년에 한 번씩 여는 개인전을 통해서만 작품을 발표하겠다고 선언한다. 아방가르드 미술을 함께했던 동료들인 한묵, 김환기 등이 해외로 떠나던 시기에 그는 오히려 자신만의 '추상의 길'을 걷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이 1964년을 하나의 '컷', 혹은 전환점으로 삼는다. 이후 시간을 플래시백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다시 순행한다. 이러한 구성은 관객이 단순 화풍의 변화를 따라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 요소인 '산'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그에게 '산'은 무엇이었을까.
"산"
(왼) 두 번째 챕터, (오) 세 번째 챕터
두 번째 챕터에서는 1940년대부터 1950년대 후반의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어두운 색감과 거친 질감, 추상 표현주의적인 붓질이 눈에 띈다.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당시의 앵포르멜과 추상 표현주의와 유사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앵포르멜이 가진 전위적 특징을 추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림과 거리를 두어야 했던 그의 삶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챕터에서는 1960~70년대 작품들을 조명한다. 이 시기부터는 작가의 조형 언어가 본격적으로 완성되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화면 속 소재의 형태는 점점 더 단순해지고, 캔버스의 형태는 더 평평해진다. 그만큼 캔버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점, 선, 면과 색의 관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를 보기 전까지 나는 유영국의 작품이 한국 미술사적으로 의의는 크지만, 오늘날 관람객에게 얼마나 강한 감흥을 줄 수 있을지 다소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실제 작품을 감상하고 생각이 달라졌는데, 그의 작품에서 여전히 조형적 아이코닉함이 느껴졌다.
특히 그의 추상이 전통적 산수화를 현대적으로 번역한 것처럼 읽혔다는 점인데, 서구 추상 회화 형식을 사용하면서도 한국 회화가 오랫동안 '산'을 탐구해 온 것의 연장선처럼 다가왔다. 그의 작품이 해외 추상 회화와 비교했을 때 어딘가 한국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 색채 때문만은 아니지 않을까.
산은 내 안에 있었다.
전시의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서는 작품이 더 고요하고 서정적 분위기를 띠게 된다. 그는 말년에 접어들며 8번의 수술을 겪고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그에게 '산'은 무엇이었을까.
유영국은 스스로 피카소 같은 천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내재화하여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평생 탐구할 원천을 정했다. 그것이 바로 '산'이다.
그에게 '산'은 고향 울진의 풍경, 즉 기억이면서 선과 색의 균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산'은 단순 조형적 재현 대상을 넘어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었다.
그는 '산'을 탐구하고 이를 제대로 담을 수 있어야만 자연 그 너머까지 화폭에 담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생애 후반에 이를수록 풍경이 확장되는 이유도 이에 있는지 모른다. 그는 '산'을 매개로 자연과 자아를 연결하며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처음엔 평생 '산'을 매개로 회화에 대해 뾰족하게 탐구했던 작가이기에 회고전이 다소 정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는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덕에 오히려 높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 마지막 영상까지 이어지는 전시 흐름은 유영국의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했던 기획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에게 '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는 그 질문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오르내리며, 유영국의 예술 세계를 설득력 있게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