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되면 젊을 때와는 달리 몸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한다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누군가는 30대도 충분히 어린 나이라며 눈을 흘길지 모르겠지만, 아직 몇 년의 유예기간이 남아있는 나 또한 가끔은 신체 부위를 새것으로 갈아끼우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젊음으로 틀어막은 신체의 문제가, 그리고 앞으로는 고장 날 일밖에 남지 않은 몸을 생각하면 슬그머니 걱정이 고개를 든다.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람, 늙고 병든 인간의 몸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책 속 세계에서는 다음 생에서 살아갈 모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생애전환 시행령’이 시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만 40세와 만 66세에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을 받음과 동시에 생을 전환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조약돌이나 맥반석 같은 무생물부터 희귀동물, 심지어는 다른 연령, 성별, 인종을 가진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아닌 존재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을 터, 그런 이들에게 이런 시행령은 꿈만 같은 일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생애전환 시행령에는 논쟁이 존재한다.
전환기의 생에 대한 긍정적인 마케팅은 그저 특정 계층을 대규모로 정당하게 안락사시키려는 차별적인 인류 말살 정책이면서 그에 따른 부정적 이미지의 환기나 정당한 논쟁조차 불가하게 만드는 매우 비윤리적인 음모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노령 인구가 인간으로서 순리대로 늙어갈 기본 권리와 사회적 효용 가치가 없어도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적 인권을 말소 당하는 사이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말은 점점 그 가치를 잃게 될 거라며 선주 언니는 개탄했다. 그러나 그건 아쉬울 것 없는 선주 언니니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승혜는 생각했다. 아프면 치료할 돈이 있고 돌봐줄 가족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라고. 그런 말은 인간의 삶이 가장 낫다는 오만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지속하는 것이 생의 변화를 꾀하는 것보다 도덕적인 삶이라는 지루한 통념에서 비롯된 말 같기도 했다.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다른 삶으로 전환하려는 적극적인 자유의지를 통제하고 억압해 비참하게 늙어가는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면서 만족감을 느끼려는 계급주의에서 비롯된 일종의 가스라이팅 같았다. (p.39~41)
지구가 아닌 먼 행성으로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남몰래 종종 하던 나로선 이런 시행령에 매력을 느끼고 주인공의 입장에 공감 가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선주 언니처럼 해당 시행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듣고 나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인용한 구절 외에도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세상에서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받는 멸시와 생애전환을 선택해야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갈과 타자기
이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승혜는 나이가 되자 고민 없이 전환을 선택하는, 심지어 그것이 당연하고 옳은 결정이라 생각하는 인물이다. 무엇이 될지 고민하던 승혜는 자갈을 선택한다. 그러나 막상 돌아온 것은 전환 불가 통지. 자연 상태의 무생물이 되려면 갚아야 할 빚이 없어야 하는데, 승혜는 66년을 살며 사회에 제공한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은 탓에 아직 사회에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분통을 터뜨릴 이러한 이유로 승혜는 자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전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타자기가 된 승혜의 일상은 고요하고 또 역동적이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아 기다림이 지속되는가 하면, 망설임 끝에 고백의 말을 적거나 치욕과 증언의 언어를 새기기도 한다. 타자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가장 조용한 청자에게 가감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승혜는 타인의 이야기에 온몸을 내어주고 있는 순간이 인간 여자 고승혜의 삶까지 통틀어 가장 뜨겁게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순간이 아닌가 생각하며 타자기의 생을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타자기인 상태로 영영 살아봐도 좋을 것 같을 만큼.
그러나 그런 시간도 잠시, 점점 타자기로써의 몸에 고장이 나기 시작한다. 눌러도 제대로 써지지 않는 타자기. 그렇게 승혜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줄어들며 승혜는 다시 기다림 속에 남겨진다.
마지막 생의 모습
그렇게 타자기 승혜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책은 난데없이 웬 바다에 버려진 타자기 승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때부터 이어지는 인간 승혜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과연 주인공이 타자기가 된 것이 맞는지, 아니 애초에 생애전환 시행령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인간 승혜의 마지막은 치매에 걸린 일이었고,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행적은 이상하리만치 타자기 승혜의 행적과 유사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승혜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닐까?
승혜의 마지막 모습과 영영 떨쳐내지 못할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의 마지막에는 어떤 기억이 어떤 사람이 남아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승혜처럼 나에게도 마지막까지 소중히 간직할 만큼 애틋한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막상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떠올릴까? 아니면 미련 가득하게 떠나보낸 누군가를 불쑥 떠올리고 말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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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등장하는 생애전환 시행령은 실존하지 않지만, 그를 둘러싼 논의나 부양해야 하는 노인들에 대한 시선은 현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맨 처음 언급했듯 나 또한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그런데, 그 두려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다른 논의로 이어지기보다는 막연히 늙는 게 싫다는 감각으로 남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면에서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는 이런 문제들을 꽤나 냉철하게, 그리고 동시에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어쩌면 작가가 늙어감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기에("노화라는 건,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고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늙음은 생이 지루해질 즈음 건네는 꽤 재치 있는 농담이자 소멸을 완성하기 위한 탁월한 진화인지도 모른다")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존엄한 죽음, 그리고 존엄한 삶이 어떻게 실현 가능할지는 말 한마디로 결론지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에는 좀 더 진지한 고민과 인간의 마지막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