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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의 <매화서옥도>는 삼베로 된 축 형태의 회화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작품이 빛에 약한 특성이 있어 어둠 속 조그마한 빛 아래 전시가 되어있었다. 그림에 다가가 찬찬히 쓸어다보며 눈송이와도 같은 매화를 발견했을 때, 마치 첫 눈이 내릴 때 떨어지는 눈송이를 포착하고 ‘눈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꼈다. 삭막한 겨울의 매마른 풍경 속에서 눈이 내림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차가운 눈이 포근한 분위기를 가져다 주는 것처럼, 매화는 극도로 절제된 한 폭의 수묵화에 유일한 흰 색채로서 은은한 향기를 불어넣어준다. 자연스레 매화를 두고 사선으로 양 편에 배치된 두 사람에게 시선이 닿자, 그 둘 사이를 매화 향기가 가득 채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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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田琦, 1825~1854)는 조선 말기 시사(詩社) 중 벽오사(碧梧社)에 속한 여항화가로, 양반 사대부 문인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며 사의적인 문인화의 정수를 꽃피운 인물이다. 그는 서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뛰어난 예술성과 문인적 기풍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양반 출신이 아님에도 화가로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여항인 계층이 재력과 한문학 지식을 갖추게 되면서 이들은 시문과 그림을 창작하고 교류하기 위한 모임인 시사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문화 향유의 주체로 떠올랐다. 18세기 말 여항문화를 이끈 옥계시사(玉溪詩社)의 뒤를 이어, 19세기에는 전기가 속한 벽오사뿐 아니라 일섭원시사(日涉園詩社),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 등 다양한 시사들이 등장하면서, 여항문인들의 문예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 수준 또한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여항화가들도 점차 회화 창작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전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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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대 양반 사대부층 사이에서는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남종문인화풍이 본격적으로 꽃피고 있었다. 남종문인화는 교양과 학식을 갖춘 문인이 자신의 내면과 사유, 철학을 은근하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사의(寫意)적인 성격이 짙은 화풍이었다. 당대 여항 계층은 전통적으로 양반 사대부 문화를 동경하며 그들의 예술 세계에 편입되기를 희망했다. 동시에 사대부들 역시 이들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고, 이들의 예술 활동을 후원하거나 인재로 천거하는 등 적극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이러한 상호 교류의 흐름 속에서, 전기가 속한 벽오사의 여항 문인들 또한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사대부 문인들과 깊이 교류하며 서화를 배우게 되었고, 자연스레 남종문인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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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문인적 삶을 지향한 여항화가들은 주로 초목과 산수를 즐겨 그렸으며, 그중에서도 사군자(四君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가장 대표적인 소재였다. 이 중 매화는 이른 봄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특성으로 인해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 되었고, 군자의 고결하고도 청아한 이미지로 많은 문인과 화가들에게 애호되었다. 그러나 매화는 속세에서 물러나 자연 속에 은거한 이들을 상징하기도 하는 꽃으로,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유명한 북송의 시인 임포(林逋, 967~1028)의 고사와 관련이 있다. 자연을 이상향으로 삼은 그는 속세를 등지고 절강성 항주 고산에 초옥을 지어 매화를 둘러 심고, 이를 벗 삼아 시를 읊으며 20여 년을 은거하며 살았다. 이처럼 문인들의 매화에 대한 사랑과 임포의 삶에 대한 동경은 조선 말기 ‘매화서옥도(梅花書屋)’ 또는 ‘매화초옥도(梅花草屋)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흐드러지게 핀 매화로 둘러싸인 은거지에서 매화를 감상하거나 독서에 잠긴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점차 임포의 삶에 대한 묘사를 넘어 작가 자신의 삶이나 소중한 인연을 투영하는 내용으로 확장되었다. 벽오사 소속 화가들 또한 매화서옥도를 즐겨 그렸는데, 근경에 다리를 배치하고, 중경에는 매화에 둘러싸인 초옥을, 원경의 산수는 은거지를 아늑하게 감싸도록 표현하는 형식은 19세기 여향문인화가들만의 독특한 구성으로 자리잡았다.

 

전기의 <매화서옥도>도 이러한 도상을 충실히 따르는데, 마치 눈송이 꽃이 핀 듯한 작고 하얀 점들로 이뤄진 매화를 중심으로 원경에는 눈이 쌓인 설경의 모습을 비교적 간결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그림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매화를 산수보다 크게 표현하고, 주변의 산수들과 초옥의 형상은 윤곽선 위주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대상의 형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기 보다 매화를 강조하고 그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는 부분에서 남종문인화법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바위와 산세의 모습을 준법을 사용해서 표현하기보다는 서예의 필법처럼 단순한 먹선으로 묘사한 것은 당대 이색화풍(異色畵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이색화파는 벽오사와 직, 간접적으로 관련있는 여항문인화가였던 김수철, 김창수, 홍세섭 등으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김정희와 그의 벽오사 제자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남종문인화풍의 토대 위에 개성적인 화풍을 이룩했다. 찰나의 즉흥적인 감성을 표현하였기에 신감각파라고도 불리며, 간결한 형상표현과 과감한 생략으로 구성된 개성적인 표현 그리고 이와 어우러지며 장식성을 극대화시키는 색채의 적극적인 활용이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전기는 남종문인화풍을 기본 기조로 삼고 이색화풍의 필치로 풍경을 묘사하여, 겨울에 추위를 뚫고 피는 매화의 고고하고도 맑은 이미지를 강조하면서도 먹과 대비되는 색조인 백색을 사용하여 만개한 매화의 향기를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갓집을 둘러싼 매화와 단촐한 설경의 조화를 통해 마치 임포와도 같은 자연 속의 간결하고도 고즈넉한 은거의 삶을 낭만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알고 보면 이 그림은 단순한 매화서옥도 도상이 아니라, 추사 김정희를 향한 전기의 깊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겨있다. 전기의 오랜 스승이었던 추사는 그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전기가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야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다. 스승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벽오사 동인들이 서화 경연을 열었고, 이 그림은 바로 그 해인 1849년에 그려졌다. 전기는 스승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복잡한 심정을 이 그림 한 폭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화면에는 'Z자'의 지그재그 형식으로 배치된 경물 중앙에 매화가 위치해 있으며, 근경에 다리를 건너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듯한 한 인물과 중경의 산속 초옥에서 매화를 감상하며 그를 기다리는 듯한 또 다른 인물 사이에 매화가 자리함으로써, 두 인물의 예상되는 만남과 매화가 은근하게 연결되고 있다. 매화는 추운 겨울을 뚫고 꽃을 피우기에 굳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자, 반가운 봄의 전령으로서 기다림의 끝에 있는 설레임과 반가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전기는 곧 만나려고 하는 두 인물과 매화에 자신의 삶을 빗대어 스승과 자신 사이의 변치 않는 정을 표현하고, 어릴 적 헤어져야만 했던 스승에 대한 깊은 그리움 그리고 마침내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순수한 기쁨을 고요히 풀어내고 있다. 그림 속 매화는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시린 세월 끝에 피어난 소중한 인연의 상징이자 진심 어린 기다림의 결정체로 피어오른다.

 

그림 속에는 짧은 제화시(題畫詩)가 수록되어있다.

 

雪意園林梅己花 西風吹起鴈行斜 溪山寂寂無人跡 好問林逋處士家 己酉夏日

눈 내린 숲에 벌써 매화가 피었거늘, 찬 바람이 일고 기러기 줄지어 날아가네. 산골짜기에 사람의 자취 없어 쓸쓸하니, 임포처사의 집을 물어볼 만하네. - 기유년(1849) 여름

 

매화를 벗으로 삼았던 임포가 겨울 끝자락에서 매화가 피기를 기다린 것처럼, 전기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린 시절의 스승 김정희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매화에 빗대어 그의 기다림을 표현하고자 했다. 마치 눈 내린 쓸쓸한 설경 속 눈송이 같은 매화가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자, 황량하던 겨울 강가 풍경이 어느새 봄을 기다리는 포근한 겨울풍경으로 바뀌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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