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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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는 기원의 빈틈에서 시작한다. 연극은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에 존재해왔다.  어디서 출발했는지 누구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는지 학자들은 밝혀내지 못했다. 영화 햄넷은 우리에게 익숙한 연극 '햄릿의 비극' 을 뿌리로 한다. 햄릿의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밝혀지지 않은, 기원을 모르는 이야기의 본성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다. 클로이 자오의 '햄넷'(2025)이 그렇다.

 

영화는 오프닝에 한 문장을 띄운다.

 

 
"'Hamnet' and 'Hamlet' were interchangeable n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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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제는, 빈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매기 오패럴이 이 이야기를 구상한 것은 10대 시절 '햄릿'을 처음 읽었을 때였다. 셰익스피어에게 햄넷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은 11세에 죽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는 '햄릿'을 썼지만 아들은 본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오직 비슷한 발음의 이름만 남아 있었다. 오패럴은 그 공백을 채우고 싶었다 — 사실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햄넷이 살았고 사랑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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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는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시처럼 느껴지는 점진적 이미지들의 리듬"에 매료됐다고 했다. 그녀는 오패럴과 함께 직접 각본을 쓰고, 촬영 전 촬영감독 루카시 잘과 함께 영국 글로스터셔의 숲에서 4주를 보냈다. 최소한의 장비만 들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숲을 배경이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로 담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크레인과 짐벌을 걷어내고, 카메라가 배우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것이 이 영화의 제작 방식이면서 동시에 주제였다 — 형식과 내용이 같은 방향을 향하는 것.

 

실재의 죽음 → 셰익스피어의 '햄릿' → 오패럴의 소설 → 자오의 영화. 이 연쇄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고, 어디서 끝나는지도 알 수 없다. 그 미지가 이 이야기들을 계속 살아있게 하는 조건이다. 이 글은 영화가 그 순환을 어떻게 경유하는지를 따라간다.


 

 

첫 번째 경유 — 전지적 시선, 알면서도 볼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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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넷'에는 반복적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인물들 위 높은 곳에서 그들을 조망하며, 이 시선은 극중 어느 인물의 것도 아니다. 잘은 이를 두고 "CCTV 카메라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실상 그것은 영적인 무언가를 표상했다"고 말한다 — 인간의 투쟁을 목격하는 어떤 존재, 다른 차원에서 현현하는 시선의 감각.

 

이 시점은 연극의 관람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전통적인 무대에서 관객은 무대보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본다. 이 카메라는 그 위치를 가져오되, 연극이 물리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곳까지 침투한다. 무대 뒤편, 숲 속 깊은 곳, 인물들이 서로 볼 수 없는 장소들을 동시에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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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윌과 가족의 장면이 그것이다. 완벽한 대칭 구도 안에서 두 방향을 동시에 보는 것은 오직 카메라, 즉 관객뿐이다. 윌이 떠나는 발걸음을 얼마나 망설이는지 햄넷은 알 수 없고, 햄넷이 아버지를 보내고 울먹이며 아그네스의 품에 안기는 것을 윌은 볼 수 없다. 서로가 볼 수 있는 건 사라지는 서로의 뒷모습뿐, 그 둘의 마지막 작별을 동시에 목격하는 것은 관객뿐이다. 그러나 그 목격은 어느 쪽에도 개입할 수 없는 자리다. 더 많이 본다는 것이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 — 삶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정되어 있고, 카메라는 그 한계를 구도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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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넷의 죽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 논리를 스스로 뒤집는다. 검은 천을 씌운 채 햄넷이 화면 오른쪽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지는 것을 담으며, 전지적 시선처럼 보였던 카메라가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 시야를 가린다. 그 공백은 어떤 시선도 채울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채울 수 없음이, 이 영화가 계속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게 만드는 힘이다.


 

 

두 번째 경유 — 생활 속의 연극적 행위, 삶과 연극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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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넷' 안에는 생활의 결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연극적 행위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흑사병의 도래를 암시하는 인형극, 아그네스 앞에서 아이들이 펼치는 역할놀이, 윌과 햄넷이 함께하는 칼싸움, 쌍둥이의 복장 바꿔 입기. 별도로 마련된 무대가 아니라, 삶의 맥락 안에서 행해지는 놀이들이다. 놀이는 현실을 잠시 유예하면서 동시에 현실의 규칙을 연습하는 행위다 — 죽음, 역할, 운명을 직접 겪기 전에 몸이 먼저 그것을 통과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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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햄넷과 주디스가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장면은 그 논리의 가장 압축된 형태다. 역할을 바꾸듯 몸을 바꾸고, 자리를 바꾸듯 운명이 오간다. 죽음은 누구에게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다.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달라지는 것처럼 — 그리고 그 어느 자리도 비어 있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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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의 놀이를 연극처럼 보게 된다. 삶의 장면인데 무대처럼 보이는 것. 이것은 윌과 햄넷의 칼싸움 장면에서 더 명시적으로 연결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노는 이 장면은 그냥 삶의 한 순간이다. 그러나 햄넷이 죽은 뒤 윌의 '햄릿' 무대에서는 칼싸움을 하는 햄릿이 등장하고, 아그네스는 그 장면에서 자신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삶의 장면이 연극이 되었고, 그 연극이 다시 삶의 감각을 소환한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 이 연쇄 안에서 그 방향은 이미 결정 불가능하다. 영화는 이런 연결을 뒷받침하듯, 장성한 햄릿 배우를 햄넷 아역 배우의 실제 형으로 캐스팅해 생경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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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윌이 목격하는 인형극 — 원숭이로부터 시작되어 왕자의 가족 전체를 몰살하는 이야기 — 도 같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흑사병이 그들의 가족에게 닿기 전에 그 형상이 먼저 인형극으로 전해져 왔던 것처럼, 어디서 출발했는지 모르는 연결고리가 이미 이 삶 안에 있었다.

 

 

 

세 번째 경유 — "To be or not to be",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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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넷이 죽고 난 뒤 아그네스는 임종 자리에 없었던 윌을 원망한다. 아들의 죽음에 충분히 애도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런던으로 돌아간 윌은, 호수 앞에서 혼자 "To be, or not to be"를 읊조린다. 완성된 대사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이라는 계기를 만나 표면으로 올라온 것인지, 아니면 삶이 비로소 대사를 완성한 것인지 영화는 그 인과관계를 모호하게 흐린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서사의 시간은 선형성을 잃고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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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중 그의 앞으로 흐르는 호수는 윌의 내면을 표상하는 자연물이다. 물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계속 흘러가는 것, 고여 있으면 썩는 것, 그러나 모든 것을 연결하는 것의 이미지다. 이와 대조되게 아그네스는 숲을 표상한다. 오프닝부터 거대한 나무의 뿌리 자리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등장하는 그녀는 극 내내 붉은 옷을 입고 아이들의 뿌리가 되어 자리를 지킨다. 햄넷의 죽음 이후 갈색 옷으로 전환되는 그녀가, 연극 앞에서 다시 붉은 빛을 띠며 아들의 부활을 목격하는 연출은 숲이 계절을 반복하며 순환하는 것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물과 숲 —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름이 오히려 서로를 향해 손을 뻗게 만드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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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는 단순한 참조가 아니라 세 번 몸으로 통과되는 구조다. 윌이 아그네스에게 신화를 들려준 직후, 어두운 교회 안에서 아그네스가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는 장면이 있다. 신화를 들은 몸이 이미 그 구조를 선취하는 장면이다. 두 번째는 햄넷이 죽은 뒤의 윌이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삶의 편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유령처럼 된다 — 그리고 영화는 실제로 그에게 '햄릿'의 아버지 유령 역을 맡긴다. 아들을 찾아 내려간 자리에서 자신이 유령이 된 것이다. 세 번째는 햄넷 자신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세상을 떠나는 그가 뒤를 돌아보는 것 — 저승으로 돌아가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다. 신화의 구조는 아그네스(선취), 윌(역전), 햄넷(완성)의 순서로 세 몸을 경유하며 삶 안에서 완성된다.

 

 

 

네 번째 경유 — 글로브 극장, 세 개의 관람이 포개지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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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가 글로브 극장에서 '햄릿' 초연을 관람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절정에 이른다. 입구에 내걸린 현수막 — "온 세상이 배우다(Totus mundus agit histrionem)" — 아래 아그네스는 군중을 헤치고 무대 앞줄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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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의 구조는 세 층위가 동시에 작동한다. 무대 위의 연극('햄릿'), 그것을 보는 아그네스(극중 관객), 그 아그네스를 보는 영화 관객(스크린 밖의 실제 관람자). 영화는 여기서 무대 뒤편의 통로, 공연이 준비되는 공간까지 카메라로 포착한다. 연극의 관객은 무대 전면만을 볼 수 있지만 카메라는 그 이면까지 침투한다 — 그리고 그 뒤편에서 유령 역을 연기하는 윌을 포착한다. 아버지이자 극작가이자, 아들의 죽음 이후 애도가 삶이 되어버린 사람이 무대 뒤에서 죽음을 연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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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이 장면에서 처음 사용하려 했던 테크노크레인을 결국 제거했다. 그 공간에 속하지 않는 이물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장치가 의도적으로 후퇴한 채 배우와 촬영감독 사이의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대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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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편 배경으로 숲을 그린 대형 백드롭이 펼쳐져 있다. 영화 초반 아그네스는 윌의 손을 잡고 넓은 초원과 숲,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땅이 보인다고 말했다. 런던이라는 '물'의 공간으로 흘러갔던 윌이, 마침내 아그네스의 세계인 '숲'의 이미지를 무대 위에 백드롭으로 재현해 낸 것이다. 분리되었던 두 사람의 존재 방식이 연극이라는 제3의 공간에서 마침내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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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서 햄릿 역을 맡은 배우는 "to be or not to be"를 고뇌하는 젊은 청년의 얼굴로 내뱉다 결국 극본대로 쓰러진다. 호수 앞에서 홀로 읊조리던 윌의 대사가 이제 무대 위에서 다른 몸을 통해 울려 퍼진다. 그리고 쓰러진 배우의 손을 아그네스가 부여잡는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가 증발하며, 뒤의 다른 관객들도 무대를 향해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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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관객과 배우 사이의 실시간 공생을 본질로 한다. 관객의 반응이 배우에게 전달되고 공연 자체를 변화시킨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스크린은 관객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아그네스가 무대에 손을 내밀어 배우와 손을 잡는 순간, 원본 없이도 마주봄은 가능해진다. 영화와 연극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건이 스크린 안에서 물리적으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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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편의 윌은 관객석의 아그네스와 눈을 마주친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에우리디케를 완전히 잃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 눈 맞춤은 신화의 역전이다. 아그네스가 교회에서 먼저 뒤돌아보며 그 구조를 선취했고, 햄넷이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며 그것을 완성했다면 — 이 눈 맞춤은 그 모든 뒤돌아봄의 귀결이다. 신화 안에서 뒤돌아봄은 상실이었지만, 이 영화 안에서 뒤돌아봄은 마침내 연결이 된다.

 

 

 

귀환 — 기원의 미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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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을 모른다는 것은 시작이 그만큼 근원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답, 존재의 현존에 대한 의문은 항상 존재해왔다. 오패럴은 "나는 그를 어떤 의미에서 부활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활은 원본의 현신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어떻게 기억되고, 해석되고, 다뤄지느냐의 문제다 — 삶이 끝난 뒤에도 그 삶이 다른 사람의 언어 안에서, 다른 매체의 형식 안에서, 다른 시대의 관객 앞에서 계속 순환하는 것. 기원이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 순환이 가능하다.

 

연출가 피터 브룩은 연극의 본질을 "빈 공간"으로 정의했다. 배우, 관객, 공간이라는 최소 요소만으로 연극은 성립하며, 그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관객의 상상이다. 배역이 공백을 가지기 때문에 다음 배우가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고, 기원이 미지이기 때문에 소설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었으며, 소설이 하나의 버전에 불과하기 때문에 영화가 또 다른 버전으로 존재할 수 있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서로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공백 안에 자리 잡으며 고유한 의미를 생산한다. '햄릿'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공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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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는 촬영이 끝난 후 이렇게 말했다. "진실과 허구 사이, 카메라 앞과 뒤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 아무런 분리가 없었다. 그것이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쓴 이유다 — 모두가 하나로 모이기 위해."

 

기원이 미지이기 때문에 순환은 끝나지 않는다. 아그네스가 배우의 손을 잡는 그 순간처럼,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우리의 마주봄은 언제나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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