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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2000)

 

 

‘빌리 엘리어트’의 춤은 ‘꿈을 향한 몸짓’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이 영화를 발레를 사랑한 한 소년의 성장담으로 기억하지만, 영화 속 빌리의 몸은 훨씬 복잡한 감정들 사이를 오간다.


그는 가볍게 날아오르다가도, 곧바로 바닥을 거칠게 두드린다. 우아하게 회전하던 몸은 어느 순간 분노에 가까운 리듬으로 무너지기도 한다. 빌리의 춤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하나의 춤만 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몸 안에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두 개의 리듬이 공존한다. 발레가 비상이라면, 탭은 충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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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발레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위를 향한다. 점프와 도약, 길게 뻗는 선들은 중력을 거스르려는 몸의 욕망처럼 보일 정도이다.

 

빌리가 춤추는 순간만큼은 탄광촌의 회색 풍경도 잠시 다른 공간이 된다. 체육관 복도와 낡은 거리, 허름한 골목은 무대처럼 변하고, 빌리의 몸은 그 공간 위를 가볍게 떠다닌다. 발레는 빌리에게 현실을 잠시 벗어나는 움직임이다. 그래서 영화 속 빌리가 발레를 하는 장면들은 늘 해방감에 가까운 감정을 남긴다.

 

하지만 빌리의 몸은 완전히 날아오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를 현실의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탭댄스다. 탭은 발레와 정반대의 방향을 가진 춤이다. 발레가 공중을 향해 올라간다면, 탭은 바닥을 향한다. 발을 세게 구르고, 리듬을 찍어내고, 충격음을 만든다. 몸이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소음을 만들어 낸다.

 

특히 빌리가 분노할 때 그가 보이는 탭의 리듬은 더욱 거칠어진다. 그것은 아름다운 공연이라기보다 감정의 폭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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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이는 영화의 배경과 맞물릴 때 더욱 선명해진다.

 

빌리가 살아가는 탄광촌은 ‘아래’로 향하는 공간이다. 광부들은 매일 땅 밑으로 내려가고, 사람들의 삶은 생존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영화 속 남성들의 몸 역시 그렇다. 빌리의 아버지는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고, 형은 분노를 폭력처럼 터뜨린다. 누구도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런 공간에서 빌리만이 몸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발레는 탄광촌의 중력을 거스르는 움직임이다. 반면 탭은 여전히 현실과 부딪히는 몸의 리듬이다. 발레가 그곳을 탈출하고자 하는 몸의 언어라면, 탭은 저항의 언어에 가깝다. 빌리는 발레로 날아오르지만, 탭으로는 끝내 현실의 바닥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이 두 움직임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빌리가 처음부터 발레만 추는 인물이었다면 영화는 조금 더 단순한 성장 서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빌리 안에 있는 거칠고 분노 어린 감정들을 지우지 않는다. 그는 섬세한 동시에 공격적이고, 자유를 꿈꾸면서도 현실의 무게를 잊지 못한다. 그의 몸은 계속 위로 향하지만, 동시에 땅을 세게 밟는다.

 

어쩌면 그래서 빌리의 춤은 더 절박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재능 있는 소년의 아름다운 무대가 아니라, 현실을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몸의 움직임에 가깝다.

 

빌리의 춤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단순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 춤 안에는 날아오르고 싶은 마음과 끝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벽을 버릴 수 없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모순을 끝까지 몸의 리듬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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