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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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삶이 좀 구겨진 것 같아서 탁탁 털어 널어보려고 부지런을 좀 떨었다. 주말에는 꼭 영화 보기를 끼워 넣었고,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는 자원봉사자 선생님들과 서로 인사할 만큼 자주 책을 빌렸다. 누워 있기보다는 자주 일어나 요리를 했고, 좋아하는 유튜버가 추천한 레시피를 따라 평소엔 쓰지 않던 딜이나 버터도 사봤다. 꽤 괜찮았다.

 

어느 주말에는 순순히 왓챠 추천을 따라 <인스턴트 늪>을 봤다. 낮에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을 때 꾸는 꿈같은 이야기가 흘러간다. 집 근처를 뛰어다니는 캇파를 봤다는 엄마, 어쩌면 내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골동품 가게의 이상한 아저씨. 그리고 모든 삶의 비극은 늪에다 마네키네코를 버리고 난 다음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겸허히 풀리지 않는 인생을 받아들이는 주인공, 하나메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 아 그때부터 인생이 잘못된 거 아닌가 하는 지점. 카르마...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나의 카르마는 초등학교 때다.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더운 여름 날이었다. 예고도 없이 펄쩍 뛰어오른 사마귀를 엉겁결에 밟아죽였다. 그리고 그날, 엄마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학교 공용 전화 앞에서 콜렉트콜이 연결되기를 기다리던 나는 몇 번이나 신호음을 들었지만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줄 서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엄마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결국 나는 전화기 앞에서 울어버렸다.

 

한참뒤에야 엄마는 전화를 받았고 엉엉 우는 나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작은 머리는 그때 이미 죽어버린 사마귀와 엄마의 부재 사이의 연관관계를 고민하며 열을 내고 있었다. 열의 결과는 식은땀과 눈물밖에 내놓지 못했지만. 인생에서 기억하는 첫 후회다. 죽이지 말 걸.

 

3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는 평균 이상으로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고, 가끔은 영화 속 레드 플래그처럼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여기가 몇 달 뒤 내가 후회할 지점인지 아닌지. 그렇게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모습을 들킨 레드 플래그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다른 복선 속으로 숨어버릴 것만 같다. 운이 좋다면 발을 헛디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고.

 

열심히 내 과거를 돌아보며 삽질하다 보면 영화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건 온갖 카르마를 감당하라고 나를 떠미는 이야기는 아니라며 태도를 바꾼다. 하나메는 열심히 자신의 과거를 망친 것으로 추정되는 늪을 되돌리기 위해 남겨진 흙으로 늪을 직접 만들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인스턴트 늪을... 어떤 계시처럼, 이게 해결책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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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일들은 거의 다 별거 아니고, 인간은 우는 시간보다 웃는 시간이 더 길고, 믿을 수 없는 것도 보이고, 하룻밤 자면 대부분 잊을 수 있어.”

 

억지스러운 대사 같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기도 하다. 웃음소리로 눈총을 받은 적은 있어도 울음소리로 경고를 받은 적은 없고 하루 종일 울다가도 밥은 먹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아도 하룻밤 지나면 다음을 생각했다. 밤만 넘기면 고통은 대체로 견딜 만한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뭔갈 시작하기엔 여름이 좋다. 여름은 밤이 짧고 낮이 기니까. 짧은 후퇴 끝에 다시 길고 긴 낮 동안 뭔가를 시도해 볼 수 있다. 시간이 내 편인 것처럼 낭비도 해볼 수 있고 무서운 밤이 오기 전에 끝없이 걸어볼 수도 있지. 그러니까 이번 여름에는 나도 늪을 하나 만들어 볼까. 어디론가 숨어 도사리고 있을 해묵은 첫 기억을 묻어 떠나보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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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스누피횬이
이 글을 읽으니, 어릴 때 T(이성적) 성향이신 부모님께서 “별 고민 아닌 걸 가지고 뭘 그러냐”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시던 모습이 F(감성적) 성향인 제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서럽게 느껴지기도 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부모님 말씀처럼 사실 별거 아닌 일들도 참 많았고, 때로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웃어넘기는 게 더 좋은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는 걸 여러 번 느꼈어요. 글에 소개된 영화도 순수하고 긍정적인 여름 분위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한 번 보고 싶네요. (윤재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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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9 21:12:44 0
제리
다른 사람의 말을 신경쓰지 않고 살고 싶지만 그게 잘 안되고 나는 왜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보면 좋은 영화인 것 같아요. 생각보다 감정은 빨리 휘발되고 영원히 슬플 것 같아도 감정은 옅어지더라고요 재현님의 영화 감상도 궁금해지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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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4 10:51:21 0
소현
최근에 읽었던 글 중에 첫 문장이 좋아서 기억에 남아 있던 글이었어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괜히 반갑고 그러네요.
따로 의식한 적은 없지만, 저도 어떤 결과가 생기면 그 원인을 곱씹으며 오래 생각하는 편이었어요.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더 나은 결과로 나아가는 게 생산적인 태도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마음의 끝은 늘 자책으로 이어지더라고요.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내 안에서 이유를 찾는 게 더 쉬워서요. 사실 어떤 종류의 일들은 꼭 명확한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예전에 했던 행동들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만 같은 마음이 저를 오래 괴롭혔어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무거운 짐을 억지로 떨쳐내려 애쓰곤 했는데, 가끔은 너무 깊게 파고들기보다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조금은 가볍게 흘려보내는 태도도 생각을 환기하는 데에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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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0 13:40:19 0
제리
저도 그래서 카르마를 믿는다고 해야 할까요 내가 어떤 원인 제공을 한 것이 돌아와서 역풍을 맞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영화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태초의 카르마를 쫓아가는 모습이 신기해서 오랜만에 집중해서 봤었구요 근데 결국은 타이밍이 얄궂은 거지 뭐 전부 제 탓으로 돌리기엔 억울한 부분이 많더라고요. 내 탓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던 시간이니 소현님께도 영화를 추천해 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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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4 10:54:16 1
루루
저도 '요즘 삶이 좀 구겨진 것' 같으면 '탁탁 털어 널어보려고 부지런을 좀' 떠는 사람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공감을 하며 읽었습니다. 수빈 님의 글은 예측할 수 없는 문장들과 표현들이 곳곳에 있어서 더 흡입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꼭 늪 같다...라는 생각을 잠시 했어요. :)

덕분에 저의 카르마, 레드 플래그, 그리고 인스턴트 늪은 무엇인지도 떠올려 보게 되네요. 살면서 꼭 한번은 뒤를 돌아보게 되고 찜찜하고 찝찝한, 왠지 모르게 식은땀이 나는 우연의 순간들이 저도 있었거든요. 마음이 섬찟한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쁜 결과를 예상하게 해 버리는. 그렇게 무한 굴레의 생각에 빠져들 때마다, (결국 너무 피곤해서 상태는 안 좋았지만) 그래도 내일이 오는 게 안심이 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수빈 님 말대로, 낭비를 부릴 수도, 가능성을 품을 수도 있는 또 다른 낮이 주어지니까요.

벌써 여름이 다가오고 있잖아요. 이미 초입에 들어선 것 같기도 하고요. 올해 중에 해가 가장 긴 시기를 맞이할 늪은 그래서 찾으셨나요? 왠지 모르게 수빈 님의 답변이 기다려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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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1 00:45:44 0
제리
늪 같다는 칭찬은 처음 듣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하네요ㅎㅎ글이라는 건 다수를 타깃으로 하기 때문에 공감대를 쉽게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 큰 과제잖아요..! 보편의 공감은 재미가 없을 때도 있고 해서 요새는 소재 고민이 컸던 시기에 빛 같은 피드백이었습니다ㅎㅎ

저는 요새 가장 큰 걱정이 건강이라 건강을 위해 술을 줄이고 자주자주 집밖에 나서는 등 활동의 늪을 만들고 있습니다..너무 허투루 쓴 신체 시간을 보강해줄 순 없겠지만 지금이라도 좀 천천히 늙고 싶은 마음에서요..뒤를 아예 돌아보지 않을 순 없겠지만 덜 후회하고 싶은 여름을 만들어 나갈 예정입니다ㅎㅎ루루님의 여름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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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4 10:58:44 1
블랙치즈
'삶이 좀 구겨진 것 같아서 탁탁 털어 널어보려고'라는 첫 문장에 저 또한 공감가는 요즘이에요ㅠㅠ 수빈님이 왓챠 추천대로 인스턴트 늪을 보셨듯 전 수빈님 글을 읽고 영화를 찾아봤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장면들의 연속 같으면서도 메시지만큼은 뚜렷한 영화라 엔딩에선 뭉클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안 믿는 주인공이 저 같아서 많이 공감도 갔구요ㅠㅠ 근데 결국 그녀가 만든 인스턴트 늪에서 용이 튀어나오고, 엄마 의식이 되돌아오는 장면에선 결국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황당할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것도 믿어야 인생이 달라진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지막 대사 '우는 시간보다 웃는 시간이 더 많다'는 말도 찡했구요ㅠㅠ

글에 새겨진 감성이 너무 좋아서 영화 또한 다르게 생각해보게 되네요. 영화를 보기 전에 글을 읽었을 때와, 보고 난 후 읽었을 때의 느낌도 달라 다르게 곱씹는 맛도 있구요ㅎㅎㅎ 시간 낭비하기 좋은, 뭔갈 시작하기 좋은 여름이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잘 지내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수빈님만의 인스턴트 늪을 만드시는 여름이 되길 바라며, 글 잘 읽었습니다! (이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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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3 01:02:02 0
제리
영화 괜찮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ㅎㅎ전 주말에 가볍게 틀었다가 심각해졌던 영화였어요ㅋㅋㅋ오..오 뭔가 쓰고 싶다 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던 영화였네요 요새는 옛날 영화를 뒤적일 때가 많은데 조상들 말 틀린 거 하나 없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개똥철학으로 느껴지던, 멋이나 잔뜩 부린 것처럼 느껴지던 그 영화들이 지금 와서 보니까 설득이 되고..또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진님도 영화를 보고 저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다니 또 반갑습니다ㅎㅎ이진님도 지나간 것들을 너무 되돌아보지 않는 씩씩한 여름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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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4 11:01:2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