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침을 깨우는 햇살보다 스마트폰의 블루라이트를 먼저 마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눈을 뜨자마자 손가락은 습관적으로 매끄러운 액정 위를 미끄러지며, 타인의 편집된 일상 속으로 침입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넘길 때마다 마주하는 화려한 일상, 이국적인 풍경,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 내는 타인들의 자기계발. 그 짧고 강렬한 이미지들의 파동 속에서 우리는 정작 자신의 안부를 묻는 법을 잊어버렸다.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을 열렬히 전시하고 숭배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누구도 온전히 행복하지 못한 '포스트-행복(Post-Happiness)'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게시란 자신이 가진 것을 외부로 드러내고, 드러낸 뒤에는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는 뜻이다. 소유는 중요하지 않다.
p74
1. 수치화된 존재: 하이퍼모던이 초래한 '데이터의 노예'
도서 <우아한 사고를 위한 철학>은 오늘날의 행복이 더 이상 추상적이거나 내밀한 관념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현대 사회에서 행복은 '좋아요'의 개수, 조회수, 팔로워 수라는 차가운 데이터와 통계로 치환된 정량적 지표가 되었다.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 기쁨은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되며, 존재의 증명은 오직 스크린 위의 수치로만 가능해진다.
이러한 '하이퍼모던(Hyper-modern)'의 주체는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린다. 최신 트렌드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끊임없이 매력적인 자아를 생산해 내야 한다는 강박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하이퍼모던의 주체가 생성하는 문화, 하이퍼컬쳐는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고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생산하고 소비한다. 보는 사람도, 보여지는 사람도 이 기이한 연극의 관객이자 배우가 되어 서로를 소진시킨다. 만족을 모르는 데이터의 증식 속에서 우리의 자아는 점점 더 얇고 투명해진다.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행복에 대한 열망이 강해질수록 실제의 행복으로부터 소외되는 '역설의 순환'이다. 우리는 더 완벽한 '행복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그러나 더 큰 자극과 더 화려한 전시를 탐닉할수록,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존재하는 소박하고 온전한 기쁨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느라,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의 향기를 맡거나 뺨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을 느낄 여유조차 잃어버린 셈이다. 이러한 구조적 비극 속에서 행복의 부재는 전적으로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개인의 무능'으로 전가된다. 실패에 대한 책임감이 개인을 옥죄며, 우리는 더욱 필사적으로 행복의 가면을 고쳐 쓰게 된다.
2. '호모 에스테티쿠스': 전시된 감정의 과잉 숭배
현대인은 미적인 것에 종속되어 삶의 모든 순간을 심미화하려는 '호모 에스테티쿠스(미학적 인간)'로 살아가길 강요받는다. 우리가 숭배하는 행복의 형상은 찰나의 쾌락과 감각적인 미학으로 가득 차 있다. 덧없이 손쉽게 얻을 수 있고, 언제든 전시 가능한 파편화된 감정들이 성)처럼 대접받는다.
깊이 있는 사유나 고통을 통한 성찰보다는, 매끄럽게 보정된 사진 한 장이 주는 '행복해 보임'이 더 큰 권력을 갖는다. 감정은 내면에서 무르익는 열매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소비되고 버려지는 패스트푸드처럼 변질되었다. 과잉된 미학 속에서 정작 인간의 진실한 얼굴과 삶은 편집과 필터 뒤로 숨어버린다.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스크린 너머로 비춰지는 그 매끈하고 결점 없는 삶은 정녕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우아한 사고를 위한 철학>은 현대에 들어서 집착에 가까운 '행복 강박'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깊은 사유나 철학적인 흥미가 아닌,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단골 주제와 빠르게 소비되어지고 있는 형태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저자는 도리어 '행복'이라는 주제에 '우아함'이라는 가치를 더해 가식없고, 자연스러운 행복에 대해 성찰한다.
타인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응시하는 사유에서부터 시작되는 우아함은 포스트 -행복 시대의 공허와 불안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