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마주하기 전까지 그 얼굴을 알 수 없다.

저마다 삶을 관통하는 단어라든가 강렬하게 남은 감정이나 기억 같은 게 있기 마련이다.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단어, 감정, 기억이 하나씩 있는데 오늘은 감정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어디선가 얘기한 적이 있을 텐데, 그 순간은 마치 어제 아침의 일처럼 선명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 안에서 갈무리되고 말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의 감정은 절망이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우울하고 무기력한지 알지 못하던 날이었다. 매일 우울에 우울을 더하면서 살았기에 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학교 상담소에서 병원 연계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다들 이 정도로 우울한 날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보통 하루를 살아내는 일은 그렇게까지 버거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벗어나고야 알게 되었다. 터널 속에서 내린 어설픈 결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일이 힘겨웠다. 몸을 일으켜서 학교 갈 준비를 했지만 주어진 하루가 너무 길어서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남으면 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면 시간이 사라졌으니까.
그런 우울을 거듭하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가기 위해 눈을 떴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절망스러웠다. 나에게 또다시 아침이 찾아오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이게 절망이라고 하는 거구나.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무방비 상태에서 마주하니 속수무책이었다. 그 순간까지가 절망이었다. 고장 난 우산을 들고 폭우를 막으려고 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의 크기는 고작 종이컵만 했는데 절망을 담으려면 들통이 필요했다.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감정이 버거워 속이 부대끼는 때가 몇 번 있었지만 삼킬 수 없는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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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반의어는 희망이라는데 사람은 희망을 잃었을 때 절망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절망을 느끼고 난 뒤에 희망을 찾게 되는 걸까. 그시기에 나는 희망 같은 거창한 걸 바라지 않았다. 하루를 버텨낼 수 있으면, 더 힘들어지지 않는다면 그걸로 괜찮을 것 같았다. 차라리 바닥에 있기를 바랐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까 봐 두려웠고, 앞으로 더 힘들어질까 봐 무서웠다. 현상 유지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희망'이란 단어 뒤에는 '-차다'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다. 희망도 활기도 기운도 차오를 수 있는데 절망은 차지 않더라. 그런데 절망 뒤에는 -스럽-이란 접미사가 붙을 수 있다. 희망에도 행복에도 붙지 않는 -스럽-은 절망 뒤에 가서 붙는다. 긍정적인 단어 뒤에도 붙지만 절망에서 퍼져나가는 건 걱정과 부담이고 모두 -스럽-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확실하고 직접적인 긍정은 흐려지지 않는데, 부정은 묘사와 상황 설명이 따라붙는다. 그 시절 나에게 행복은 추상적이고 절망이 확실했는데 언어는 나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수렁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잘도 돌아갔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여기서 나와서 저기까지 기어가는 것 말고,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텔레포트 하고 싶었다. 인형도 기계 안에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뽑아가던데 나한테는 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만, 회피한다고 한들 생겨난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였더라도 내 것인 감정이다. 절망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절망스러웠던 과거가 남는다.
절망이 지나간 페이지가 된 지금은 그때 그 단어를 온몸으로 배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엄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경험으로 분류하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합리화하는 게 아니고 누군가 어떤 절망을 이야기할 때 그게 뭔지 절절하게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주파수가 맞아야 알 수 있는 소재를 만났을 때 간접 경험을 끌고 와서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나의 세상이 조금 넓어진 게 아닐까. 부정이든 긍정이든 잘 아는 감정이 하나 늘어났다. 그리고 그건 나를 이루고 있는 구성 물질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