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수무책으로 시간이 흘러간다. 언제까지나 강의실에서 매주 얼굴을 볼 것 같던 친구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버렸다. 최초의 어린 시절 이래로 쭉 학교에 속한 채 노력하지 않아도 정다운 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손쓸 새도 없이 모두 흩어졌다. 대학생 때부터는 학교에서 함께 있는 시간보다 각자의 삶을 책임지는 시간이 더 크기 때문에 서로 어느 정도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란 걸 짐작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역시 애달프다.
지난 몇 년 함께한 날들을 돌아보면, 잠깐 오랜 꿈을 꾼 것 같다. 내겐 치열하기만 하던 캠퍼스 생활은 항상 먼저 강의실에 앉아 환하게 반겨주던 친구들 웃음소리를 듣고 잠시나마 긴장이 풀리곤 했었다.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는 나를 위해 시험 기간이 되면 빵과 음료를 챙겨주고, 교내 일정이 있으면 접수 기한을 놓칠세라 늘 상기시켜 주었다.
바삐 달려 도착한 책상에서 교수님이 들어오시기 전 몇 분간 빠르게 전하는 근황과 점심으로 어떤 메뉴를 고를지 등의 실없던 수다가 그리운 것이 될 줄 몰랐다. 막연하게 또 오만하게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이 평생 같은 자리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자꾸만 밤 기차를 탄 사람이 된다.
기차에 무언가 두고 내렸다 잠깐 잠이 들었고 일어나 보니 옆 좌석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다시 잠이 들었다 깨 보니 다른 누군가 타고 있었다 다시 잠들었다 깼을 때 또 다른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기차는 멈춰 있었다 나는 서둘러 가방과 우산을 챙겼다 기차에서 내리자 겨울밤의 냉기가 밀려왔다 사람들을 뒤따라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처음 보는 역이었다 처음 보는 지명이었다 모두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쌓인 눈 위로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차에 무언가 두고 내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뒤돌아보니 기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어디론가 가고 있다 누군가 날 깨워주길 바랐다
- 밤 기차, ⌜단지 조금 이상한⌟(강성은) 수록
난 꼭 무언가 두고 내린다. 잠깐 잠들어 고등학생이란 꿈을 꾸고 나니 내 옆엔 처음 보는 누군가가 있다. 다시 또 정신없이 잠들어 대학생이란 꿈을 꾸고 나니 다른 사람이 내 곁으로 왔다. 한 번 더 사회란 꿈을 꾸고 나니 누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대학에서 내려야 할 시간이란다. 서둘러 눈에 보이는 것만 급하게 이것저것 챙겨 내리니 냉기만 숨으로 들어온다. 가라는 대로, 사람들 가는 대로 계단 오르고 서둘러 개찰구 빠져나왔다. 정말 처음 보는 세계다. 처음 보는 역이고 지명이고 모두 한 방향으로 죽은 자의 행렬처럼 걸어간다. 기차에서 내린 뒤의 발자국은 어지럽고 정신없다. 내가 급하게 내리느라 기차에서 친구들을, 그들에게 조금 더 살펴주지 못한 것들을, 더 깊은 눈과 마음으로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정말 건네고 싶었던 말들을 두고 내려버렸다. 두 손에서 놓쳐버렸다. 그것을 깨닫고 뒤돌아보니 기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여전히 난 사람들에게 떠밀려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고 있고, 누군가 나를 이 또 다른 잠에서 깨워주길 바란다.
누구나 밤 기차를 타고 간다. 잠깐씩 든 잠에서 깨어나 보면 주위엔 다른 누군가. 또 다른 누가 억지로 깨워 일어나 보니 내려야 하는 시간이고, 다 챙기지 못한 채 얼렁뚱땅 사람들 따라 목적지도 모르고 걸어간다. 두고 내린 것이 이제야 생각나 아차 싶어 뒤돌아보면 기차는 가버렸다. 또 다른 잠에 빠진 채 떠밀려 걷는다.
이제 잠에서 깬 것 같은데, 또 남들 따라 찬바람 속에서 처음 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반드시 무언가를 또 두고 내리겠지. 정신 차려 보면 이미 떠나 있겠지. 이제는 안다. 지금 사라진 것은 밤 기차 속 한바탕 꿈에 두고 내린, ‘단지 조금 이상한' 시간 속의, 사랑하는 내 친구들. 어디로 갔는진 몰라도 잘 갔으면 좋겠는 내 잠 속의 구원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