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시인은 이미지를 비틀어 쓴다. 부드러움에서 날카로움을 드러내거나, 뜨거운 것에서 차가움을 떠올린다. 대상의 속성에 대한 전복은 사물의 이면에 다가가려는 아름다운 시적 표현이거나, 뒤틀린 현실을 반영하는 사나운 직언이다. 그러한 시인의 시도는 오직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두 가지의 첨예한 선택지만을 가지게 될 테다. 그러나 사물의 속성에 대한 완전한 전복이 아니라 속성의 극단성만을 떼어내는 방식으로 온순하게 아름다워지는 시도 있다. 예컨대 태우지 않는 불의 온도 같은 것.
안희연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을 읽는다.
그는 날이 제법 차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외롭다고도
오늘은 불을 피워야지
그는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다
불아 피어나라 불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
삼키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 <불이 있었다> 중에서
날이 서늘했기에 몸을 녹여야 했을 테다. 아니 몸보다는 “조금 외롭다고” 느끼는 마음이 더 시려서 그러했을 테다. “마른 장작”을 모으고 그 위로 바람처럼 “노래”를 부치자 불이 태어난다. 그 불은 삼키고 태우는 거센 불이 아니라 다만 “쬘 수 있는 불”이다. 태우고 녹여서 뒤섞을 만큼 뜨겁지는 않고, 언 손을 함께 쬐었을 때 “손금이 뒤섞이는” 정도로만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은은한 불. 그것이 태어나자 모두가 그 주위로 기꺼이 모여들었으니, “누구도 해치지 않”으며 일렁이는 그 불의 이름을 ‘연대’라고 말해도 좋을까. 그 앞에 오래 머물렀을 때 발생하는 것은 모인 것들의 온기이고, 온기가 만들어낸 온기는 “불이 꺼진 지 오래이건만 / 끝나지 않”고 보존된다.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중략)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 <소동> 중에서
그렇다면 애써 연대라는 이름의 불을 피워 올리던 ‘그’는 누구일까. 아마도 그는 형체가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은 사람이었을 테다. 하얗게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나서야 그의 생을 끌어온 슬픔의 윤곽이 겨우 보이는 사람.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배경 뒤로 투명하게 숨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일부러 내보이려 애쓰고, 자신이 “뭉개지거나 녹지 않”은 채로 여기 있다 외치면서 우산도 없이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맞는다. 비록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안부를 물어오지 않아도, 그 스스로를 아름답게 피어날 수 없는 “썩은 씨앗”이라고 인식할지라도, 그는 기어코 세상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내보인다. 왜 그래야 할까. 세상에서 희미해지면 통증 없이 편안할 것을, 그는 굳이 초라한 자신의 “비밀을 들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일까.
아마도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큰 우산 뒤에서 지친 몸을 숨기고 있던 어느 비 내리던 날, 초췌하게 젖은 채 거리를 헤매던 개를 만난다. 개는 초라하게 젖은 몸뚱어리를 세차게 털어 물방울을 튀기고 나서 다시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젖기를 반복한다. 그는 가혹한 빗속에서 즐거운 듯 반복하는 개의 몸짓에서 자신과 같은 슬픈 모양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 씨앗이 ‘나는 살아 있다’고 외치는 절실한 생명의 아우성을 들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혹은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산책 가기 싫어서 죽은 척하는 강아지를 봤어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중얼거리는 하루
(중략)
살아 있음,
나는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 것 같다
실패하지 않은 내가 남아 있다고 믿는 것 같다
- <업힌> 중에서
자신의 슬픔을 또렷이 아는 사람이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나아가 자신의 슬픔으로 세차게 외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슬픔을 발견한다.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목격하며 나의 진실을 새로이 발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산책 가기 싫어서 죽은 척하는 강아지”를 보고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며 죽어가던 나를 직시하는 것이다. “예쁜 걸 곁에 두면 예뻐질 줄 알고 / 책장 위에 차곡차곡 모아온 것들”이 사실은 자신을 끔찍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아름답게 포장된 ‘산 척’을 끝내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무늬를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나와 당신의 슬픔은 ‘살아 있음’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슬픔이 다른 슬픔을 부름으로써 진실해지는 일을 연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기꺼이 자신의 슬픔을 먼저 외쳐 연대의 빛을 만들어낸다. 슬프게 살아남은 자신을 증언해줄 슬픈 타인이 필요했기에, 슬픈 이들이 모이고 둘러앉을 온기를 피워낸다.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존재할 때 불의 온기는 필요해진다. 예컨대 “만년설을 녹이기 위해” 추운 곳에 먼저 필요한 것은 애매한 온도의 불보다 “안에서부터 스스로 더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외부의 추위다. (<추리극>) 물론 바깥의 추위는 나의 온도를 지킬 수 있으나, 당신까지 지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온기를 만들고 지켜내는 연대의 불을 피워낼 곳은, 그러므로, 고통에 싸여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가 당도한 “예상치 못한 언덕” 정도가 적절하다는 것. 그곳은 오고가는 무수히 많은 것 중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며, 오직 그 한 마리를 위해서, 기꺼이 울상을 짓는 그런 언덕이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비록 그곳이 아직 무덥고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도 괜찮다. 연대에 필요한 것은 함께라는 사실만으로 슬픔의 “어떤 시간이 반으로 접힌” 장소다. 그곳에서 피워올릴 불은 우리의 푸른 언덕을 결코 태우지 않을 불길 없는 불이며, 언제나 시원하고 따뜻한 불이다. 널리 이롭게 하는 프로메테우스적 불. 우리가 여름의 언덕에서 배운 것은 이런 다정한 불을 피우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