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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모든 연결이 끊겨가는 세상. 집 앞 도로에서는 커다란 싱크홀이 건물과 차를 집어 삼키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재난이 뉴스를 통해 송출된다. 지구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혼란 속에서 뜬금없는 전광판 하나가 불을 밝힌다.

   

 

CHARLES KRANTZ

39 GREAT YEARS!

Thanks Chuck!

 

 

마이클 플래너건 감독의 영화 <척의 일생>은 스티븐 킹의 단편집 「피가 흐르는 곳에」에 수록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원작의 독특한 시간 구성을 스크린에 옮겨, 스티븐 킹 특유의 상상력 위에 인간 존재에 대한 찬가를 표현해 내었다.


톰 히들스턴이 연기한 ‘척’은 평범한 회계사이다. 미스테리한 첫 등장이 지나고 그를 점점 들여다보게 되면, 평범함 속 그만의 고유한 세계가 숨 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가 특별할 것 없는 이 개인의 죽음과 한 세계의 종말을 동일한 선 위에 올려 놓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안에 살아 숨쉬던 세계가 그와 함께 소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억이나 상처, 우연히 본 잊을 수 없는 풍경, 즐겨 듣던 음악. 모든 것들이 숨이 멈추며 함께 빛을 잃는다. 영화는 척의 이야기를 빌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거대한 우주를 품고 사는 존재임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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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영화의 백미는 척이 거리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순간이다.

 

정해진 박자도, 약속된 파트너도 없지만 그는 기꺼이 리듬에 몸을 맡긴다. 어쩌면 이렇게 운명이 모이는 듯한 찰나의 순간들에, 다가올 죽음이나 멸망 따위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관객 역시 그 순간에 사로잡힌 채,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척의 스텝을 따라가며 그 감각에 동화된다. 영화가 인용하는 월트 휘트먼의 「Song of Myself」 속 구절처럼, 그는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거대한 우주로서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비극적 운명 앞에서도, 인간은 이렇듯 춤을 추고, 사랑을 하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영화는 척의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언젠가 당신의 우주가 저무는 날, 당신은 어떤 삶을 돌아보게 될 것인지에 대해.

 

영화가 흐르며 관객에게 다가오는 그의 결심은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철학을 떠오르게 한다. 척에게 사과 나무는 바로 춤이었던 것이 아닐까. 비록 언젠가는 세계가 소멸할지라도 내 안의 생명력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 그것은 예견된 종말에 맞서는 아름다운 저항처럼 보인다.

 

 

Mike Flanagan's particular style of storytelling is honed to a fine point in The Life Of Chuck.jpg

 

 

원작 소설의 마지막, 자신의 끝을 직접 목격한 척은 이렇게 되뇌인다.

 

 

나는 그를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갈 거야. 나는 훌륭하고, 훌륭할 자격이 있고,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확인하며 문을 닫는다. 그가 내뱉은 말은, 우주가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는 존재의 주인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멸을 향해가는 시간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깃든 무수함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묵직한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말. 그 앞에서 우리가 택해야 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오늘의 춤을 추는 것이라고.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당신만의 리듬을 잃지 말라는 외침과도 같다. 그렇게 <척의 일생>은 주어진 유한한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존엄임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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