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이를 좀 먹었는지 잔병치레가 잦아졌다. 얼마 전에도 감기로 일주일 정도 고생했다. 여름에는 거의 달에 한 번꼴로 장염에 걸려서 내과를 오갔던 것 같다. 처방전에 찍힌 외계어 같은 이름의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면 얼마 안 가 몸이 괜찮아진다는 게 신기했다. 아마 정확한 약을 썼기 때문이다. 장염에 감기약을 쓴다고 증상이 호전될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내 몸이 아픈 이유가 무엇인지, 거기에 필요한 게 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게 이리 중요하다.
처방해 준다는 건 어디가 아프다는 뜻인데 그걸 줬으니, 우리가 아픈 건 분명하다. 해독제는 체내로 들어 온 독 성분을 무력화시키려고 쓰는 약이다. 해독제를 처방받았으니 일단 중독된 건 맞으나 무슨 독에 어떻게 당했는지는 모르겠다. 몸이 배배 꼬이지도 않고 숨 쉬는 게 힘들지도 않다. 그렇다고 몸이 뜨거워진다거나 구토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증상도 없이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신체가 아니라 정신과 마음을 갉아먹고 있는 이 독의 이름은 인생이고, 주로 쇼츠를 통해서 감염된다.
["문학은 어떻게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것일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아흔 살 여성의 답을 들려준다. 저자는 제인 오스틴 작품 다시 읽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편집하고, 감춰져 있던 내면의 목소리를 재발견하며, 결국 '새로운 인생의 장'과 마주한다. 그만큼 그에게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은 삶의 위치, 과거와 현재의 인간관계, 삶의 선택을 좌우한 가치들을 다시 평가하게 할 만큼 풍요롭고 복합적이며 문제적인 텍스트였던 것. 제인 오스틴의 여섯 작품들 속에서 루스 윌슨이 발견했던 것은 인간관계의 복잡성, 우정의 가치, 사랑의 의미, 삶의 균형 등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 심지어는 길거리에도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모두가 1분 남짓한 시간에 스쳐 지나가는 영상에 눈을 고정하고서 파편화된 세상을 무한에 가깝게 소비한다. 온라인으로 숨어든 자들은 한 덩어리로 봐야 온전한 모습인 세상을 아주 잘게 쪼개서 우리가 빠져들 만한 모습으로 재조립한 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살포한다. 이 독성 무기에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해 서서히 중독되어 가고 있다는 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증상이 발현되는 경우는 두 가지다. 배터리가 방전되거나 집에 두고 나왔을 때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 용납하지 않으니, 증상을 느낄 새가 있을 리가 없다.
["열다섯 살에 [오만과 편견]을 처음 읽고 내 삶은 빛으로 환해졌다. 방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오스틴의 언어가 머릿속에서 음악이 되어 울렸다. 그 우아한 소리는 이따금 부모님이 터뜨리는 언쟁의 소음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베넷가 딸들한테서 편안한 자매애 같은 걸 느꼈다. 엘리자베스 베넷과 나를 동일시한다는 건 당치도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모델이었고, 최소한 친하게 지내고 싶은 부류의 여자아이였다. 그 시절 내가 원하고 필요로 한 것은 우정이었다."] (118~119쪽)
증세가 심해지기 전에 이 독 성분을 중화해야 한다. 책만큼 효과적인 약이 없다. 심지어 그게 200년도 전에 태어난 사람이 쓴 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독을 중화시키려면 그에 상응하는 작용을 하는 성분이 필요하다. 200년 전 사람의 사고방식을 담은 전혀 다른 형태로 작동하는 책은 쇼츠와 인생이라는 독성을 제거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책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면 소비할 수 없고, 시간을 들여 찬찬히 들여다봐야만 열리는 세계다. 누가 마음대로 쪼개서 바꾸지도 못하고 그 안에 담긴 인생은 답답하리만치 느리게 흘러간다. 이보다 더 강력한 카운터는 어디서도 못 찾는다.
책을 많이 접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말들이 무슨 뜻인가 혼란스럽기만 할 텐데, 그런 사람일수록 이 처방전에 걸맞은 환자다. 무작정 책을 읽는다고 치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약도 어느 약을, 얼마나, 언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알고 써야 효과가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책도 방법을 알고 써야 쇼츠라는 독성을 잡아낸다. 그러니 부디 처방전을 찬찬히 훑어보고 올바른 방법으로 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