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라멘 한 그릇을 떠올려 보자. 후지산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의 그릇 안에는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뽀얀 국물의 라멘이 담겨 있다. 약간 곱슬곱슬하면서 노란 면이 따뜻한 국물에 푹 담겨 있고, 그 위에는 형형색색의 고명이 담겨 있다. 윤기가 도는 차슈 옆엔 기름방울이 띄워져 있고, 그 옆엔 동그랗게 썰린 파들과 김이 올려져 있다. 살짝 올라오는 따뜻한 김에 라멘 냄새를 들이 마시고 국물부터 한 입 한다. 이 순간만큼은 추운 겨울이 좋아지고 만다.
그럼 이제 당신에게 라멘을 만들어준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정성으로 만든 엄마나 아빠? 단골 라멘 가게의 사장님? 여행에서 만난 맛집? 유튜브를 보며 처음으로 라멘 요리를 해낸 본인? 누구를 상상하느냐에 따라 라멘의 국물, 토핑, 맛이 다르게 상상될 것이다. 왜일까? 맛의 취향은 경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은 각각의 입맛이 다른데 어느 지역을 가나 ‘최고의 맛집’은 항상 줄을 서있다. ’최고의 맛‘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개성 넘치는 주인공들의 성장기를 담은 영화 담뽀뽀를 소개한다.
프레임 속 프레임의 의미
“당신도 영화 보러 왔어?” 스크린 속 중절모부터 발끝까지 흰색으로 빼입은 신사가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영화관에 샴페인과 고급 피크닉 세트를 세팅하고 자신은 영화를 보며 과자 먹는 소리를 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말하며, 영화에 집중하라 한다. 극적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비가 세차게 오는 도로 위 트럭 운전수 두 명이 라멘을 맛있게 먹는 법에 대해 말하며 영화는 또 새로운 프레임 속으로 들어간다. 프레임 속에 프레임 또 그 안에 있는 프레임 구조는 이 영화의 전반적인 구성을 말해준다. 최고의 라멘 가게를 만들고 싶은 ‘담뽀뽀’와 그녀를 돕는 개성 넘치는 주인공들의 명랑한 성장기 영화 같지만, 영화 중간중간 ‘맛’과 ‘식욕’에 대한 뜬금없는 에피소드들이 마치 광고처럼 등장한다.
감독은 다양한 ‘맛‘에 대한 물음표를 단편적인 영상들을 통해 던진다. 남들과는 다른 맛, 쾌락의 맛, 역겨운 맛, 재밌는 맛 등 다소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단편집들을 중간중간 넣으면서 관객 스스로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영화를 보자고 말하는 중절모 신사의 말 때문에 담뽀뽀의 이야기가 더 현실감 없는 영화처럼 느껴졌는데, 그가 라멘을 위해 노력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다가 맥락 없는 단편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그 모습이 더 영화적으로 보이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담뽀뽀의 성장이 이뤄질 때마다 그에 맞는 단편 영상들이 더욱 빈번하게 나온다. 예를 들면 담뽀뽀가 진정한 라멘의 맛을 찾고 싶다고 하면서 단련을 할 때 비즈니스 미팅 식사 자리에서 눈치 없이 미식가의 면모를 보이는 막내 사원의 모습이나, 스파게티를 먹는 강연을 하지만 결국 서양인이 먹는 방법대로 교양 없이 따라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모습은 마치 맛을 탐구하는 것엔 지식이나 그 나라의 문화가 중요하게 작용하는가? 하는 질문을 남기는 것 같다. 또 담뽀뽀가 국물의 맛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는 남녀가 음식 재료를 갖고 관계를 가지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날계란을 서로의 입을 통해 옮기며 그 미끌미끌한 촉감을 보는 이들로 하게끔 느껴지게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날 것’의 초연적인 맛을 생생하게 관객에게 연상시키게 하고 담뽀뽀가 단련하고자 하는 미식의 정수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프레임 속의 프레임은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따로 노는 것 같아 솔직히 정신 사나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적 흐름과는 별개로 느껴지는 자극적인 오감이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맛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특별한 체험처럼 느껴지게 한다.
셋이서 덤벼도 도망가진 않아요
주인공 ‘담뽀뽀’는 홀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라멘집을 운영한다. 운명처럼 트럭 운전수인 ‘고로’와 그의 동료가 동네 깡패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녀의 가게로 들어가 그들과 담판을 짓게 된다.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무력으로 사람들을 제압하는 (사실 제압 당하게 되지만) 장면은 코미디 영화가 아닌 서부극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서부극을 칭하는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명칭을 따와 ’라멘 웨스턴‘이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영화를 홍보하기도 했다 한다.
혜성처럼 나타난 고로의 투쟁을 보고 새로운 삶의 눈을 뜨게 된 건 담뽀뽀만이 아니다. 그의 아들 ‘타보’는 비가 오는 날에도 먼지 나게 친구 무리들에게 맞고 다니는 어린아이였다. 동네 깡패들에게 맞은 고로를 위로하며 그는 자신도 맞고 다니지만 셋이서 덤벼도 도망가진 않는다고 말한다. 담뽀뽀의 근성을 닮은 아이는 영화 후반부에 성장하여 폭력에 일어나 맞서고, 결국 세 친구를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담뽀뽀를 짝사랑하던 동네 깡패도 고로와 결투 끝에 친분을 맺으며 라멘 원정대에 합류하게 되며 사랑하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담뽀뽀의 라멘 국물이 진해질수록 그녀와 주변 인물들의 성장도 눈에 띄게 발전하는 모습이 인생이 얼마나 깊고 맛스러운지 보여주는 것 같다.
’담뽀뽀’라는 말은 일본어로 ‘민들레‘를 뜻한다 한다. 허름하고 작은 라멘집에서 그녀는 성공을 이뤄 하얗고 큰 민들레 그림이 그려진 자신만의 가게를 열게 된다. 거친 시멘트를 비집고 자라 희망을 피워내는 민들레처럼 ‘나 자신‘을 라멘 가게에 반영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운 모든 캐릭터들의 인생이 진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영화이다.
일본에는 3대 철학이 있다 한다. ‘환대’ ’화합’ 그리고 ‘장인 정신‘이다. 담뽀뽀에는 이 모든 철학이 진하게 담겨있다. 트럭 운전수 고로와 그의 동료를 환대하는 담뽀뽀의 첫 마음, 낯선 사이에서 라멘 하나로 똘똘 뭉친 이들의 조화로운 관계, 그리고 라멘의 진정한 맛을 위해 근성을 발휘하는 모든 이들의 장인 정신까지. 1985년 개봉 영화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신선한 연출이 가득한 이 영화는 영화를 볼 때보다 끝난 후 천천히 곱씹을 때가 더 궁금증이 많아지는 신기한 매력이 있다. 담뽀뽀가 이룬 가게의 큰 벽면을 가득 채운 민들레 꽃을 생각하며 내일 하루는 어떤 그릇에 무슨 맛을 들이키게 될지 기대하게 되는 영화 담뽀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