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에비타〉를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관람했다. 이 작품은 1978년 웨스트엔드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아 온 뮤지컬으로, 작사에 팀 라이스(Tim Rice), 작곡에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가 참여했다. 두 사람은 〈에비타〉에서 무르익은 실력을 통해 걸출한 명곡들을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2006년 초연, 2011년 재연 이후 14년 만에 무대에 올라왔다. 이제는 걸작을 넘어 고전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에비타를 블루스테이지 제작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다.
지난 12월 14일, 유리아 배우가 에바 페론(에비타) 역을 맡고 한지상 배우가 체 역, 김바울 배우가 후안 페론 역으로 출연한 회차를 봤다.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의 생애를 그린 뮤지컬 〈에비타〉에서, 유리아의 에바 페론은 능동적인 여성상으로서의 에비타 서사를 뛰어난 가창력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난도 높은 넘버와 아르헨티나의 정열적인 춤까지 밀도 있게 소화하며 작품이 요구하는 매력과 에너지를 충실하게 보여줬다.
‘에바 페론’이라는 실존 인물을 그려낸 만큼 해석에도 공을 들인 듯했다. 이 작품은 ‘체’라는 관찰자 역할의 캐릭터를 내세움으로써 에바 페론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체는 첫 등장부터 관객석에서 달려오며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의 시선이 곧 관객의 시선임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관객으로 하여금 에바 페론에 관한 질문을 대신 던지게 만드는 존재다.

성스루 뮤지컬로서의 〈에비타〉
〈에비타〉는 대사 없이 노래로만 극이 진행되는 성스루 뮤지컬이다. 성스루 형식의 작품을 관람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대사가 등장할 법한 순간에도 음악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이는 오페라에서의 레치타티보(대사를 노래부르듯 표현)를 연상시키지만, 에비타에서는 말 그대로 ‘대사를 전달’한다기보다 노래, 연기, 안무 등을 통해 ‘표현’되는 느낌이었다.
성스루 뮤지컬인 만큼 배우들의 체력과 집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요구되는 게 느껴졌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인 뮤지컬보다 오히려 연기력이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모든 가사가 곧 대사가 되고, 그 말인즉슨 한 음절 한 음절마다 감정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유리아 배우의 연기력이 특히 눈에 띄었다. 유리아 배우는 마치 에바 페론이라는 인물 자체가 된 것처럼 무대를 이끌어나갔기에 기억에 남았다.

성스루 구조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에비타 캐릭터의 음악적 모티브는 인물의 정체성을 더욱 축적하고 강화한다. 나 역시 아직까지 툭 치면 “Don’t Cry for Me Argentina” 멜로디가 나올 만큼, 또렷하게 각인된 듯하다. 선율은 내용이 진행되면서 변주되어 등장하는데, 이때 같은 멜로디를 통해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음악적 힘을 드러낸다.
섬세하고 정교한 연출
이번 공연에서 눈길을 끌었던 요소는 조명과 공간 연출이었다. 무대 소품과 배경 구성은 특별히 화려하게 만들어지기보다는 웅장하고 조형적인 면모를 지녔다. 그런 배경을 활용한 정확한 무대 전환, 섬세한 조명과 앙상블의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무대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명의 활용이 눈에 띄었다. 번갈아 비치거나 대비되는 조명의 색은 인물 간의 대립 이미지를 주기도 하고, 에비타의 양면성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Rainbow High(더 높이 찬란하게)” 넘버에서는 무지개색 조명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아예 ‘에바 코인’ 조명 고보를 통해 무대 위에 돈이 흩뿌려진 듯한 표현,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은사 막 앞에 실시간 라이브 영상을 띄워 연설의 이미지를 주는 등 대담한 연출이 엿보였다.

연출과 음악 둘 모두 돋보였던 장면은 반 페론주의인 상류층과 군인들이 함께 노래 부르는 넘버였다. 상류층은 무반주 합창을 통해 고급스러운 느낌을, 군인은 록 음악을 통해 마초적인 느낌을 주며 조명색 또한 분홍빛과 청록빛으로 어우러지는 것은 물론 대비감까지 주었다.
모든 요소는 결국 마지막 장면을 향해 수렴된다. 화려함과 에너지로 쌓아 올린 무대는 마지막에 이르러 가히 놀라울 정도로 비극적인 연출로 마무리된다. 신화처럼 소비되던 에바 페론의 삶을 표현한 〈에비타〉의 넘버들은 다시 한번 짧게 되돌아보는 순간 한 인간의 비극으로 끝난다.
그러나 뮤지컬의 매력은, 비극적 결말 이후에도 커튼콜에서 모든 인물이 웃는 얼굴로 다시 올라온다는 데 있다. 커튼콜 이후에는 관객의 뜨거운 호응 속에 한지상 배우의 앙코르 무대가 이어졌고, 공연은 밝은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