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나는 항상 무언가를 수집해왔던 것 같다. 어느 프랜차이즈에서 식품을 구매하면 같이 주는 위생용 티슈들, 이곳저곳에서 모아 신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빳빳하고 거친 질감의 종이 엽서들, 가십걸과 웨스턴 컬쳐에 빠져 있었을 때 해외직구로 수집했던 손소독제들 등등...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수집의 범위를 비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으로 확장할 때 그 행위는 영감이라는 양분을 가꾸는 노동이 된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을 통해 삶을 좀 더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경험을 수집한다거나, 인생에서 없어도 되었을 법한 경험들이 남긴 뼈아픈 교훈들을 품에 안는 것 같은 일들 말이다. 그리고 재벌가의 딸이나 개발도상국 판자촌 딸의 삶과 같이, 내가 나로 태어난 이상 살아볼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담은 문학 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의 돌파와 같은 것들.
나는 그 돌파를 좋아한다. 그리고 마음에 남는 문장들은 수첩에 담아두었다가 삶이 나를 불행서사의 주인공처럼 몰아붙이는 순간에 다시 읽으면 그제야 의미가 또렷해진다.
때문에 필사를 취미로 가진 지는 약 3년 정도 된 것 같다. 문학이나 영화같이 나의 세계를 넓혀주는 것들은 대개 그것이 완전히 끝나고 난 뒤, 그러니까 서사 자체에서 빠져나와 온전한 타자가 됐을 무렵에서야 한 문장 한 문장을 재배치하고 음미하며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여름의 빌라 - 백수린
오랜만에 꺼내 본 필사노트의 가장 첫 장에는 무슨 글이 적혀져 있을까.
첫 장을 넘긴지 몇 년이 흐른 탓에 첫 문장이 또렷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표지를 열 때 묘한 긴장감이 따라왔다.
오랜만에 열어 본 필사노트의 맨 처음 페이지에는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 속 문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기에 물기가 배어 있던 초여름 밤의 풍경이 향기가 되어 그의 코 끝을 스쳤다. 그럴 때면 그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몇 캔 더 사서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풍경은 언제 감각의 형태로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 걸까 이끼 냄새 나는 반지하 방에 홀로 요를 깔고 누워 있다가도 그는 취기가 오르면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책의 저자 백수린은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친애하고, 친애하는》 등을 비롯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특유의 섬세한 문장력과 감각적인 서사를 인정받았다. 그 결과 젊은작가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동세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01. 시간의 궤적
02. 여름의빌라
03. 고요한 사건
04. 폭설
05. 아직 집에 가지 않을래요
06. 흑설탕 캔디
07. 아주 잠깐 동안에
08.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여름의 빌라>는 총 8편의 단편 소설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매해 여름이 되면 의례행사처럼 꺼내 읽는 <여름의 빌라>는 책 뒷표지에 적힌 표현을 빌리자면 백수린 특유의 우아하고 침착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녀의 문장이 지닌 함축성과 치밀함을 짚어낸 한 평론가의 말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절제된 어조 속에서 서서히 번져오는 감정의 결이 독자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때 나는 처음으로 홀로 긴 여행을 떠나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충만함, 달콤한 자유로움,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에 취해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44 페이지를 읽으며 홀로 긴 여행을 떠나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충만함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또 내 삶의 지반을 흔들 수 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안일한 기대심으로 작년 여름 혼자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다.
비록 먼 곳도, 긴 여행도 아니었고 내 삶의 지반을 흔들만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은 시시한 여행이었지만 그 시시한 여행에서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한여름의 한낮 시간대에 혼자 성산일출봉을 오르며 했던 생각들은 결코 일상생활에서는 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들을 수집하게끔 했다.
그날 정수리에 내리쬐던 직사광선에 온몸이 살균되는 듯한 더위를 느끼면서도 극단적인 상황이 가져다주는 맹목적인 감정이 좋았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표면적으로 달라진 건 한사코 없었지만 인생에서 한번쯤은 있어도 괜찮겠다 싶은 경험과 감정을 수집했다는 점은 내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마 그것은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된 이가 느낄 수 있는 충만함, 달콤한 자유로움과 같은 것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글을 쓰는 지금은 그날에서 한참을 지나 2025년 12월의 중순을 향해 가는 지점에 있다.
영하 5도에서 영상 35도 얘기를 꺼내자니 온도 차이 만큼이나 멀어진 시간의 간극 때문인지 그날에 느꼈던 감정들이 잘 체감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때 느꼈던 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누군가에게는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는 것들 그리고 그런 것을 수집하는 일. 그것을 나는 앞으로도 부단히 좋아하고 싶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 책은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내게 이 책을 선물해준 이는 내가 대학에 와서 처음 만난 친구였다. 낯선 영어 교양에서 수업 시작 후 십여분이 지나 들어온 그 애가 내 옆자리에 앉은 시점을 기점으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멀어져 관계의 소멸이 가져다주는 허무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지만, 지금도 이 책을 읽을 때면 오렌지의 금빛 싱그러움을 닮은 그 친구가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누군가는 순간의 기억으로 평생을 산다고 한다.
여름의 절정을 지나고 있는 지금 이 기억들을 되도록 오래 간직하고 싶다.
그치만 후에 시간에 의해 현재의 기억들이 희석된대도 슬프진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그때 느낄 수 있는 것들로 채울테니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게 바닐라 아이스크림인지 스프인지 모를 계절이 지나고
만성 비염의 계절이 오면, 또 그러다가도 아이스 커피보다 따뜻한 커피가 더 좋아지는 그런 계절이 오면
내 삶의 부피가 얼마나 팽창해 있을지 기대된다.
2024년 여름을 지나며.
2024년 여름, 아무도 나를 모르는 타지의 벤치에서 여름의 빌라를 읽으며 남겼던 일기를 지금 다시 펼치면 예컨대, 한때 흘려보낸 사소한 생각들마저 시간이 지난 뒤엔 모두 의미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