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에는 천재들의 연구소라 불리는 고등연구소 IAS가 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맥스웰, 오펜하이머와 같이 이름만 들어도 '헉'소리 나는 과학자들은 이곳에서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했다. 우연히 내 알고리즘으로 들어온 어떤 영상은, 아인슈타인이 IAS에서 연구할 당시 살았던 그의 집을 소개했다. 엄밀히 말하면 집의 외관을 소개했다. 내부를 공개하지 못한 이유는, 지금 그 집에 누군가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같은 거물이 살았던 곳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저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아인슈타인, 혹은 그 이전의 누군가부터 지금 현재 저 집에 살고 있는 누군가까지 약 1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수많은 자들을 보고 듣고 품었던 저 공간이 가진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5.jpg

 

 

나의 이런 호기심을 정말 영특하게 담아낸 영화가 있다. 영화 <히어>는 한 공간, 한 터전에서 살아갔던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고정된 화면 속에서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오가며, 사랑과 이별, 재회를 반복한다. 영화는 단 하나의 공간, 한 집의 거실, 혹은 나아가서 그 집의 터전을 중심으로 수많은 세대의 삶과 감정, 선택과 후회를 묵묵히 바라본다. 카메라는 팬, 틸트, 줌과 같은 흔한 촬영 기법도 사용하지 않는다. 마치 집 안의 기둥이나 가구, 또는 바위가 되어 수십, 수백 년에 걸친 삶의 순간들을 지켜보는 듯하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갈등하고, 떠나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고정된 시선을 통해 펼쳐진다.


놀랍도록 일상적이고 현실적이다. 크고 특별한 사건은 없다. 하지만 지루할 틈도 없다. 오히려 대단할 것 없는 일상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평범함 속에 누구나 겪었을 법한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에게 자신과 가족을 투영시키는 어느 순간, 관객은 비로소 나의 가족, 나의 삶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다.

 

 

2.jpeg

 

 

터전, 이야기가 머무는 공간

 

릭키라는 한 인물의 삶은 탄생부터 성장, 사랑, 결혼, 노년까지 이어진다. 그의 삶은 다른 시대의 가족들과 겹치고 반복되며 교차한다. 모든 것은 각기 다르지만, 또 닮아 있다. 그 모든 순간들이 바로 터전 위에서 벌어진다. 사람은 떠나지만, 남아있는 집과 땅은 수많은 세대의 이야기를 품고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그렇게 한 공간에 겹쳐지는 수많은 이야기는 삶이 얼마나 다채롭고 신비로운지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0.jpeg

 

 

공간이 품은 감정


릭키의 부모 알과 로즈의 관계, 그리고 릭키와 마가렛의 사랑과 갈등은 영화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서사다. 특히 마가렛은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아내이자 엄마이지만, 때때로 이기적이고 감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감정과 선택은 모두 충분히 이해된다. 집은 행복함과 동시에 갈등과 후회의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기는 “이 집이 난 정말 좋았어.”라는 고백은 단순한 장소에 대한 애착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이 인간의 삶에 담아내는 감정과 시간의 깊이를 실감하게 하는 한 마디이다. 마가렛의 말은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우리는 때로는 터전을 떠나려 하고, 새로운 것을 꿈꾼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곳이 우리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가족과의 작은 다툼, 함께 웃었던 식탁 위의 저녁, 평범했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리운 추억이 된다.

 

 

1.jpeg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흐르는 삶


이 영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카메라의 시선이다.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는다. 관객은 철저히 관찰자가 되어 한 세대의 시작과 끝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고정된 시선은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마가렛과 릭키의 젊은 시절, 결혼과 갈등, 그리고 노년기의 회한이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앞에서 흘러간다. AI 기술을 활용한 배우들의 얼굴 변환은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고 현실적으로 담아낸다. 청년기의 얼굴이 서서히 노년기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어색함 없이 시간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또한 시대가 전환될 때마다 화면의 일부분을 먼저 변화시키고, 곧 전체 화면이 해당 시대로 확장되는 방식은 시간의 흐름을 부드럽게 보여준다. 각 시대가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이어지는 전환은 마치 시간의 강물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4.jpeg

 

 

삶의 반복성과 유일성


삶은 반복성과 유일성을 동시에 갖는다. 출생과 죽음이라는 같은 시작과 끝을 가졌지만, 그 사이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다. 모든 선택과 감정은 결국 이해할 수밖에 없는 무게와 깊이를 지닌다. 모든 터전에는 소중하고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언젠가 끝나겠지만 터전은 그대로 남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그렇게, 땅 위에서 흘러간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