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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가야금을 몇 번 뜯어보고, 한국무용을 즐겨보았기에 국악과 친밀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막상 떠올려보니, 국악 공연을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예술적 실험의 장이자 새로운 발견을 조명하는 <수림뉴웨이브 2025>의 공연을 보게 된 것이 더욱 기대되었다.


김희수 아트센터에서 진행된 <수림뉴웨이브 2025>는 ‘결:예술가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한국 전통 음악은 오랜 시간을 이어와 연주자에 따라 고유의 결을 갖는다. 결은 하나의 선처럼 시대를 가르고 구분 짓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과거와 현대는 잇는 흐름이 되기도 한다. 결의 아래에는 예술가의 시간과 경험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층위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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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림이 주목한 10인의 예술가 중, 11월 27일 아쟁 연주자 조성재의 공연 ‘진면목’을 감상하였다.


<진면목>은 조성재의 생장 과정을 한 무대에서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산조-민요-씻김이라는 세 장을 따라가며,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나이테를 더해가며, 새로운 잎을 틔우는 과정으로 음악을 펼쳤다.


하나의 흐름처럼 무대의 상공에는 물결이 반짝였고, 그 아래에서 조성재는 자신의 시간을 울림으로 드러냈다.


첫 곡 김일구류 아쟁 산조는 조성재의 음악적 뿌리이다. 선율이 시작되자, 오래된 나무의 지층처럼 소리 안에 눌어붙은 시간이 드러났다. 산조는 단순히 기교를 보여주는 장르가 아니라, 굿과 판소리의 원초적 가락에서 뻗어 나온 몸의 리듬이다. 중중모리장단에 이르러 활을 밀고 당길 때, 그의 어깨와 손목의 떨림에서 오랜 배움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산조는 잘 표현하고 싶어서 늘 어렵다. 배우는 깊이가 연주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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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곡 ‘사계절 노래’는 삶을 사계절에 비유한다. 나무가 해마다 나이테를 늘려가듯, 사람의 삶도 계절마다 다른 무늬를 남긴다.


곡의 봄은 담담하면서 활기찬 다정함으로 열리고, 여름은 뜨거움과 묵묵한 인내가 느껴지고, 가을은 색이 옅어지듯 선율이 가라앉았다. 겨울의 음은 투명하게 얼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생존의 힘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관객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어이-!”라는 호응은 곡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튀어나왔고, 어떤 이들은 리듬에 맞춰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사계절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다시 켜켜이 쌓여가는 나이테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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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곡 ‘씻김’은 씻김굿 전통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뉴웨이브의 곡이다.


초입은 잔잔한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하였지만 이내 깊은 저음이 지층을 뒤흔드는 것처럼 솟아올랐다. 천장의 조형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듯하였고, 공연장 전체가 하나의 바람을 맞는 숲처럼 흔들렸다.


고요와 폭발, 전통의 결과 현대의 결이 서로 포개지며, 완전히 새로운 잎 하나가 돋아나는 순간을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관객의 ‘어이-!’와 같은 호응이 가지 끝의 새잎처럼 피어났고, 조성재는 그 호흡을 받아 연주를 이어갔다.

 

'씻김'이라는 제목답게, 내 안에 오래 쌓인 부정한 기운들을 물리듯 울리는 소리에 가슴이 뚫리는 듯한 경쾌함이 있었다. 답답했던 현대의 숨이 걷히고, 잠시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신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무대는 하나의 판이자, 살아 있는 숲이었다.


조성재는 민요, 판소리, 굿, 연희를 두루 흡수해 자신만의 결을 쌓아온 연주자다. 2024년 KBS 국악대상에서의 대상 수상은 그가 쌓아온 깊이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가 어린 날 굿판에서 처음 아쟁을 잡은 이후, 전통의 뿌리를 따라가며 켜켜이 만든 시간이 바로 그의 나이테였다.

 

이날의 무대는 조성재라는 ‘나무’의 시간을 바라보는 자리였다. 그리고 ‘진면목’이라는 공연명은 그의 음악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자라나는지 보여주는 이름이다. 그는 뿌리에서 시작된 결을 지금의 언어로 확장해 가며 전통의 나무에 새로운 잎을 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홀 안에는 잔파동이 남아 있었다. 아쟁의 한 줄이 흔들릴 때마다, 오래된 뿌리 위에서 미래의 숲으로 뻗어져 나가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2026년 그가 틔울 또 다른 새잎을 기다리며, 이 밤의 나이테 같은 무대를 기억 속에 아로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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