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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특히 심장이 아삭아삭해지는 계절이 있다.

 

첫눈이 내리던 11월 26일이 떠오른다. 새해까지도 시리게 추웠던 작년의 겨울이.

 

 

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 고선경

  

토마토를 씻고 물을 버렸다

그사이 한 달이 다 갔다

 

내가 죽고

나에게도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다

 

눈이 내리는 소리 대신

녹는 소리 들었다

 

친구들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 먹고 술 먹고 울고 웃었다

그게 좋아서

 

박장대소

 

토마토는 얇게 썰어서

꿀이나 설탕 뿌려 먹는 게 맛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안주잖아 기억나지?

 

알지

우리가 제일 잘 알지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거

다 마음이라서

 

 

낡고 이상한 세계에서

더 낡고 더 이상한 세계로

옮겨 가는 동안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무연히 지켜봤다

 

영원히 찾아 헤매겠다 생각했던 것들

 

무수한 별, 아름다움

어둠 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사람의 것과 사람의 것 아닌 아름다움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기억하지 마

 

다시 십이월이 올 거야

 

 

우리가 만나서

왜 헤어져야 하는지

 

슬픈 질문 앞에서 충분히 슬퍼했다면

박수와 함성

 

너무 고요해서 귀를 막고 싶은

 

길고 눈부신 어둠 속

묻어 둔

내 예쁜 금붕어 한 마리와

우리가 살아서 나눠 가진 아름다움

 

잘 다녀왔어?

거짓말은 안 통하던

수많은 저녁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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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상실 이후에 관한 작품은 대개 ‘남겨진 사람’의 입장에서 쓰인다.

 

애도라는 과정은 끝도 없이 외로워서, 죽은 사람과의 기억을 끊임없이 붙잡느라 과거에 매몰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상실을 파고들다 보면 어딘가에 갇히게 된다. 과거의 기억만 영원히 재생하는 영사기와 내가 단둘이 남겨진 폐극장 같은 공간에. 그렇기 때문에 남겨진 사람은 남겨진 사람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실과 애도가 갖고 있는 구조적 속성이 그러하다.

 

그래서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의 입장에서 쓰인 <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는, 남겨진 사람은 볼 수 없었던 시야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화자는 ‘내가 죽고/나에게도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을 시작으로 자신이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알린다. 자신의 죽음을 한 달 간 애도한 이후, 눈이 녹을 때쯤 화자는 자신의 남겨진 친구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도 술도 먹고 울고 웃으며 이제서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친구들. 그리고 화자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박장대소’한다. 친구들이 여전히 생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 기뻐서.

 

또 자신과 친구들 사이에 공유하던 기억을 주고받는다. 토마토 술안주라든가.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우리만’ 깔깔대던 그런 기억들. ‘기억나지? 알지. 우리가 제일 잘 알지.’ 이런 대화들과 함께.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동안, 화자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의 남겨진 친구들에게 자신을 ‘기억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이 남은 이들의 몫이라면 결국 그것은 애도와 슬픔인 법. 그래서 화자는 친구들이 헤어짐에 대해 충분히 슬퍼했다면 이제 박수와 함성으로 슬픔을 끝내기를 바란다.

 

십이월의 폭설이 모든 걸 덮어 줄 수 있기를, 그리고 너희가 눈물도 슬픔도 없는 깨끗한 자리에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화자는 ‘우리가 살아서 나눠 가진 아름다움’을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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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망각이다. 죽은 사람과 오직 둘이서 나누었던 기억은 이제 혼자만 오롯이 갖고 있는 기억이 되었고, 그렇기에 내가 그 기억을 잊는다면 죽은 사람의 흔적 하나가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기억의 끈을 계속 붙잡으려는 노력이 어떠한 책임으로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친구들에게 자신을 ‘기억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죽은 사람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남은 사람들이 자신을 뒤로 하고서라도 계속해서 생을 이어나가기를 바라고, 우리가 함께 나눴던 아름다움만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고 나서도 서로의 기쁨만을 바라는 관계가 있다. 다시 만날 날에 나눌 이야기들을 잔뜩 쌓아 놓고도 평생을 기다릴 수 있는 사이가 있다.

 

*

 

다시 십이월이 왔다.

 

일 년 사이 나의 심장은 얼마나 아삭아삭해졌을까.

아쉽지만 나는 계속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서 나눠 가졌던 모든 아름다움을.

 

너도 기억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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