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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주인공 트랍스는 출장 중 차 사고로 인해 우연히 시골 마을의 한 저택을 방문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저택은 은퇴한 판사의 집으로, 그는 검사·변호사·사형집행관 출신들과 벌이는 만찬에 트랍스를 초대한다. 그들은 만찬에서 ‘모의 재판’을 치르며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여기서 트랍스는 피고인 역할을 맡게 된다.


전직 검사였던 초른은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트랍스의 죄를 캐내려고 한다. 전직 변호사였던 쿰머는 트랍스에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단순히 모의 재판 ‘놀이’라고 생각한 트랍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트랍스가 다니던 회사 내에서 아주 전형적인 꼰대 상사 기가스가 있었는데, 그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또한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았던 기가스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로 말미암아 초른은 트랍스에게 유죄, 사형선고를 내린다.


기가스는 정말 우연찮게 죽음을 맞이했다. 트랍스가 그의 심장을 흉기로 찌른 게 아니다. 평소 앓고 있던 지병으로 인한, 안타까운 불의의 사고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초른은 기가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혹시 속으로나마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지 않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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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트랩]은 스위스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단편소설 [사고]를 원작으로 하는 블랙코미디이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과장된 전개와 기괴한 상황을 통해 인간의 위선과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며, 단편소설 [사고]는 특히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 중 하나라고 한다. 연극 [트랩]은 우리 인간은 의식하지 못한 채 죄를 짓기도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검사가 피고인도 몰랐던 죄를 파헤쳐 가면서, 연극을 관람하는 우리들도 극의 제목대로 ‘트랩’에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연극은 굉장히 짜임새있게 만들어졌는데, 작중에서 언급되는 용어도 중요하다. 한 예시로 ‘게리히트(gericht)’는 독일어로 법정이란 뜻과 함께 음식, 잔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의 재판을 벌임과 동시에 고급 요리와 와인을 함께 곁들인다. 이야기가 고조될 수록 그들이 마시는 와인의 숙성도가 함께 올라간다. 그 중에서 미필적 고의는 가장 핵심이 되고 중요한 단어이다.

 

초른이 트랍스에게 내린 죄목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다. 기가스가 아내의 불륜 사실 때문에 충격을 받아 죽은 게 아니냐는 것. 아마 이 재판이 모의가 아닌 실제였다면,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불충분하여 사형 판결이 나지 않았을 것 같다. 또한 노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행위는 어디까지나 ‘모의’ 재판이고, 그들이 정말로 트랍스를 심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님을.


하지만 트랍스는 초른의 논리에 할 말을 잃는다. 그리고선 자신은 명백하게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소리친다.

 

*

 

솔직하게 이야기 해서, 가끔 나를 힘들고 괴롭게 하는 사람이 좋지 못한 일-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지는 등-을 겪기를 바란 적이 있다. 나에게 있어 나쁜 사람이니, 상상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걸 아쉬워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생각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어쩌면 일어났을 수도 있는데 그 자리에 미처 내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상상만 했지만 실제로 그런 생각과 함께 ‘행위’를 저질렀다면, 나 역시도 죄인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살면서 죄를 짓지 않는 게 더 어려운 듯하다.

 

여섯 명의 등장인물 중, 필레에게 가장 눈길이 갔다. 판사, 검사, 변호사는 과거 자신들의 실제 직업이었기 때문에, 모의 재판에서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 트랍스는 자신도 몰랐던 죄를 알게 되면서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사형집행자인 필레는 더 이상 사형 집행을 할 수 없어 인생의 따분함을 느낀다. 따분함만 느끼면 다행이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필레에게 있어 사형 집행 자신의 존재 가치를 실현하는 행위였다. 분명 그 직업에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집행관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존재 의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나 역시 지금도 스스로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지만, 늙어가면서 필레와 같은 길을 걷게 될까봐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사형 집행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매긴 필레가 안타깝다고도 생각이 들었다.

 

의도치 않게 저지르는 죄, 존재 가치의 하락.. 인간의 삶이란 살아감에 있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려해야 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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