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인 수잰 스캔런은 여성, 정신의학, 읽기와 쓰기, 자기 돌봄에 대한 깊은 성찰과 탁월한 문학적 형상화로 미국에서 주목 받고 있는 작가이다.
그런 그녀의 신간인 의미들은 저자가 자신의 정신병동 장기 입원과 낙인의 기억을 문학 읽기 경험에 겹쳐내며 다시 써 내려간 회고록이자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 관해 많이 알지 못하는 나는 이번 기회로 그녀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어쩌면 다루기에 조심스러울 수 있는 소재를 그녀만의 시선이 담긴 필체로 깊이 있게 써내려간 글을 보며 이제껏 내가 읽어왔던 소설의 영역을 한층 더 확장시키는 느낌마저 받았다.

총 3부로 이뤄진 이 책의 초장 부분만 읽더라도, 인용과 기록, 성찰과 비평이 콜라주처럼 맞물리는 형식이 회고록과 문학비평의 경계를 여실히 확장해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특별히 실비아 플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 버지니아 울프,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재닛 프레임 등 마음의 고통에 천착했던 여성 작가들의 문장과 자신의 경험을 교차해 쓰면서 ‘고통의 언어’를 ‘의미의 언어’로 이행시키고, ‘미친 여자’라는 낙인의 존재를 성찰의 주체로 재전유한다.
나아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읽기가 어떻게 돌봄이 되는가”를 증언하며, 상실의 자리에서 삶의 의미들을 회복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책의 많은 구절이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지만 그 중에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 몇개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 분석가의 무관심은 폭력적으로 느껴졌고, 부서지기 쉬운 자아에 가해진 또 하나의 타격이었다.'
소설 속 그녀의 입장에 공감한다는 건 다소 경솔하게도 느껴지지만, 적어도 이 문장에 한해선 그녀 뿐만 아니라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와 같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쯤 겪을 수 있는 상황에 대입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호의가 누군가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듯, 무관심 또한 어쩌면 형태는 없지만 그렇기에 그 비가시적인 형태가 지닌 폭력성이 누군가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가시적 형태의 폭력만큼이나 클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 같다.
'그 시절, 예술은 하나의 빛이었다. 나에게 통곡과 그리움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경계선 위에서 혹은 경계선 바로 너머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예술을 빛에 비유한 이 문장을 보자마자 속에서 고양되어지는, 감화되는 감정을 일순간 느낀 것 같다. 당장의 기아에 허덕이는 이들 앞에서 예술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진, 너무도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여전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그런 예술 덕에 누군가는 생의 끝에서 살아 숨쉴 희망을 발견한다.
예술을 논하기에 내가 너무 얄팍하다고 느껴진 순간들, 반대로 예술이 도대체 뭐길래 그토록 예술을 추앙하는지에 대한 반의들이 뒤섞인 순간들이 지나고 결국 다다른 지점은 그럼에도 예술은 존재해야 하고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삶과 예술은 어쩌면 너무도 닮아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예술이 삶에 대해 말을 걸어온다고 느낄 때, 예술이 삶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듯 할 때.
'예술은 하나의 빛이었다'라는 그 단순하면서 의미있는 이 문장 하나가 그동안 내가 해왔던 예술에 대한 고찰들을 너무도 선명히 관통하는 하나의 조각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 두 문장 말고도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멈칫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단순히 한 여성 작가가 겪은 회고록, 에세이라고 부르기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너무도 지대하게도 느껴진 순간들이 많았다.
모든 작가가 이야기를 쓸 때 경험한 이야기를 쓰는 건 아니지만, 확실한 건 경험한 이야기에 대해 쓰여진 글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세심하고 진실된 손길 같은 것을 느끼도록 한다.
수잰 스캔런이라는 작가를 몰랐던 나와 같은 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그녀 삶 위에 많은 것들이 포개어지며 만들어진 그 원석과도 같은 '의미들'을 향유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