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친 여자를 좋아한다. 나부터가 미친 여자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 내가 정신과 약을 복용해서만은 아니다. 그 전부터 나는 미쳐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미쳐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신 병동에서 3년을 보낸 수기 <의미들>을 읽었다. 이 책은 정치적 감정으로서의 우울에 대한 앤 츠베트코비치의 <우울: 공적 감정>을, 낙인찍는 행위에 대해 깊이 분석하는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을, 각각 자신의 섭식장애와 알코올 중독 일대기를 담은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과 <드링킹>을, 여성 우울증을 다각도로 분석한 하미나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 외에도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떠올린 책이 많았다. <의미들>을 읽는 경험은 고향에서 가장 자주 먹었던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경험이었다. 항상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의미들>이 조금 특별한 점은 미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넘어 광기란 무엇인지, 이 사회가 광기를 어떻게 다루는지, 자신의 광기가 이 사회에서 어떤 맥락을 차지하는지 등 광기 그 자체에 대해 분석한다는 점이다.
이 책의 부제는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이다. ‘마음의 고통’을 이야기할 땐 지극히 내밀한 개인사를 얘기하고, ‘읽기’를 얘기할 땐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그만의 광기가 서린 작품들을 소개한다. ‘마음의 고통’은 그녀를 무너뜨렸던 사건이고, ‘읽기’는 그녀를 구원해준 사건이다.
정신 병동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은 ‘마음의 고통’과 ‘읽기’ 사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신 병동은 병든 그녀를 치료해 주는 곳이지만, 동시에 ‘정상인’과 그녀를 완전히 유리시키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수잰 스캔런으로서의 광기를 지우고, 환자로서의 광기를 얻었다. 그곳에서 벗어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는 묻는다. 광기에 대한 현대 의학의 정의는 정확한가?
한 북토크에서 ‘좋은 에세이는 독자를 쓰고 싶게 만든다’라는 말을 들었다. 몇 년이나 지났지만 그 말은 좋은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예외 없이 떠올랐다. <의미들>을 읽는 동안에도 쓰고 싶은 나의 이야기들이 수시로 생각나 중간중간 책장을 덮고 상념에 젖곤 했다.
책을 읽으며 되짚어보니 내 삶은 광기와 그리 멀지 않았다. 나의 한 친척은 10대 시절에 겪은 일로 그 이후의 인생을 모두 정신 병원에서 보냈다. 어린아이의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이었다. 그 얘기를 들었던 시절은 지금보다 정신 질환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이 강했었고, 내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때의 나는 내가 정기적으로 정신과를 찾는 어른이 될 줄 몰랐다.
말로만 듣던 우울증을 처음 겪은 건 코로나 때였다. 전 세계를 뒤덮은 팬데믹으로 인생은 하루아침에 암흑 속에서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처럼 막막해졌다. 모든 사람의 삶이 아무 잘못 없이 무너졌고, 그 사이에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취업 전선에 나와 다가올 날을 불안해하고, 지나간 날을 후회하는 내가 있었다.
안 좋은 순간엔 힘들고, 좋은 순간엔 기쁘다. 이 당연한 상식이 무너졌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아무리 해내도 기분이 안 나아졌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우울해지기만 해서 일부러 ‘슬플 만한’ 상황에 나를 내던져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런 내가 나도 낯설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돌아버린 지 오래였다.
수면 패턴이 불규칙해졌고, 눈물이 많아졌다. 잠은 오지 않고, 펑펑 울기만 하는 밤은 가장 두려운 시간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울면서 핸드폰만 보던 밤에 우연히 코로나 블루로 힘들어하는 청년을 위한 무료 상담 지원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다행히 좋은 상담사를 만나 우울증 초기였던 내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그때 나를 위로해 준 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건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아파서다. 아프면 고치면 된다. 나는 내 감정이 통제가 가능한 범주에 들어가서 기뻤다.
그 시절 나는 당장 내일 죽을까 봐 무서웠지만, 5년이나 더 살아남았다. 쉽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몇 살 더 먹은 나는 이제 나의 우울에 대해 다른 방향의 질문을 떠올린다. 그게 나 한 사람의 질병만 치료하면 되는 일이었을까? 코로나로 취업 시장이 불황인 건 충분히 우울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국민 대부분이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과제 때문에 자신을 혐오하고 절망에 빠지는 게 ‘당연한’ 일인가?
나는 궁금했다. 대체 어떻게 이 정도 절망이 당연할 수 있는지. 정말 나만 못 견디는 건지. 이제는 안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의 아픔을 숨기고 산다는 것을. 모두가 갈망하고, 서로에게 강요하는 당연한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 후로 정신 건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현대 사회의 흐름에 발맞춰 지내다 보니 어김없이 정신 건강이 안 좋아졌다.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일하다 보니 번아웃이 찾아온 것이다. 이번엔 상담에 그치지 않고 약물 처방까지 받았다. 확실히 약을 먹으니 그렇게 힘겨웠던 일이 버틸 만해졌다. 그리고 내겐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약으로 버티는 일상이 정상인가?
수잰 스캔런의 우울은 그녀만의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녀의 우울을 단지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을 겪어서, 호르몬이 고장나서 생긴 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여성에게 가혹한 사회 현실이, 죽음과 광기를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복잡한 사회 문제를 약으로만 해결하려는 시도는 안일하기 그지없다.
대체 정상이 뭘까? 수잰 스캔런을 살게 한 예술 작품은 모두 불가해한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들이다. 우리가 이런 예술에 감응하는 건, 예술가와 작중 인물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술가의 광기를 지나치게 낭만화하고, 그들을 ‘우리’가 아닌 ‘저들’의 영역으로 밀어낸다. 사실은 모두가 마음속에 비정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기 바쁘다.
책 도입부에는 어빙 고프먼의 <수용소>에서 발췌한 문장이 인용된다.
아무 데도 소속되지 못하면 안정적 자아를 갖추지 못하겠지만, 한 사회 단위에 전적인 헌신과 애착을 보이는 것도 일종의 자아 없는 상태를 암시한다.
자신이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의식은 더 넓은 사회집단 속으로 끌려 들어간 결과로 생길 수 있는 한편, 자기다움의 감각은 그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하는 소소한 방식들을 통해 생겨날 수 있다.
사회를 향한 전적인 헌신과 애착이 일종의 자아 없는 상태를 암시한다는 부분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들 때마다 나를 가장 아프게 괴롭혔던 건 ‘나만 유난인가?’ ‘내가 이상한가’?라는 의심이었다. 그 의심은 나를 아프게 했지만, 동시에 사회로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하며 나를 지켜주는 또 다른 힘이었다.
수많은 예술이 이러한 저항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수잰 스캔런의 <의미들>처럼 말이다. 그녀는 진부해 보여도 책에 의해 구원받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녀의 책이 또 다른 누군가를 구원할지도 모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