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형태는 생각보다 더 다양하다. 지위로 구분하면 모성애, 부성애, 연인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등이 있다. 감정의 방향으로 구분하면 짝사랑, 쌍방향의 사랑 등으로, 정서로 구분하면 열망, 애증, 동경, 플라토닉한 사랑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구분했다고 해서 그들이 상호배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짝사랑이 알고 보니 쌍방향의 짝사랑일 수도 있고, 열망과 애증이 동반하기도 하고, 연인에게 향하는 사랑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 향하는 사랑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복잡하게 다가오는 것은 애증이나 집착도 사랑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2018년 초연을 하고, 올해 사연을 하는 연극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에게 애증과 집착의 모습을 보이는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연극은 나이를 먹어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살리에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는 모차르트의 죽음을 회상하며 그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살리에리에게 관객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사람이고,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단 한 번만 전해지는 고백’이다.
살리에리의 독백과 함께 시간은 그가 궁정악장이었던 때로 돌아간다. 화려한 궁, “불꽃놀~이”와 축제가 이루어지는 곳. 이곳에서 살리에리는 곡을 썼다. 주제가 사랑이면 세레나데가, 죽음이면 진혼곡이, 기념이나 환영이면 행진곡이 되었다. 능력만이 아니라 기품과 지성이 넘치는 듯한 그는 황제에게는 물론, 대중에게까지 칭송받았다.
그런 살리에리 앞에 ‘천재’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젊은 음악가 ‘모차르트’가 등장한다. 나이가 한 자릿수였을 때부터 놀라운 피아노 실력을 자랑했다고 소문이 무성한 만큼 살리에리는 그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와 긴장을 품었다. 실제 마주한 그의 모습은 ‘음탕하고 더러운’ 농담이나 나누고 모두가 고개 숙이는 황제 앞에서도 발칙한 장난을 하는 등 예의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듯한 인물이었다. 그래도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등장을 축하하며 행진곡을 연주한다. 그의 음악을 들은 모차르트는 단 한 번의 연주로 곡을 외운 것도 모자라 자신의 스타일로 변화시킨다. 모차르트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변주를 해 보세요. 히히히히히."
하며 시시덕거리기까지 한다. 살리에리는 분함을 느낀다.
"난 그때 처음으로 누구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물리적인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음악적인 면에서의 죽음이다.
살리에리는 영악함을 숨기고 모차르트 주변에서 그를 옥죈다. 모차르트의 여자인 콘스탄체를 유혹하려 들고, 모차르트의 약점인 가난과 아버지에 대한 결핍을 이용하면서 결정적으로 그를 죽음으로 내몬다.
아마데우스
연극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를 서술자로 이끌어가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다. 뮤지컬 <모차르트!>와 달리 주인공이 안토니오 살리에리다. 모차르트에 대한 그의 질투, 분노, 수치 등이 서려 있다. <아마데우스>는 155분의 공연에 살리에리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 10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살리에리의 차력쇼’ 같기도 한 만큼 살리에리의 내면을 지독하게 헤집는다.
그럼에도 작품 속 살리에리의 감정이 어떤 감정인가를 물었을 때 시기나 질투라는 등 한 단어로 떨어지는 대답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모차르트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그지만 유일하게 모차르트 음악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살리에리의 그 심오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해 봤다.
비극적이고 파멸적인 짝사랑
살리에리는 궁정 음악가였다. 궁에서 사용되는 곡을 만들 뿐 아니라 황제를 가까이 하는. 그가 곡을 쓰고 공연을 시작하면 많은 이들이 그를 찾아 공연장의 자리를 채우고 찬사를 보냈다. 대중의 반응이 모차르트의 음악보다 예찬적이었다. 이미 인정받고 있는 그지만, 그는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아 보였다.
도리어 모차르트에 대한 갈망이 커져만 갔다. 모차르트가 곡을 얼마나 쓰고 있는가를 알아내려 했고, ‘작은 바람들’이라 불리는 소문에 휘둘렸으며, 그가 공연을 하면 살리에리는 광신도 같은 관객이 되었다. ‘피가로의 결혼’이 상연되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과는 모순적인 모습이었다.
그토록 미워하면서 그의 음악에는 누구보다 심취하고 있다니.
내가 아는 단어 중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애증’이다. 어쩌면 시기나 질투보다는 이쪽에 가까울지 모른다. 모차르트의 능력을 보며 그를 시샘하지만 그 누구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기다렸다. 모차르트를 궁에 들인 황제보다 모차르트에게 관심이 많았다.
살리에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은 모차르트와 같은 곡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은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도 곡 쓰기에는 집중하지 않고 음탕한 농담과 파티, 당구 등을 즐기며 살아가는 모차르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같다.
생각해보건대 그는 모차르트와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살리에리가 진혼 미사곡을 쓰고 있는 모차르트를 찾아간 장면이 떠오른다. 모차르트는 곡의 빠르기, 구성, 변주에 대해 말했고, 살리에리는 그의 말에 따라 음표를 그려나갔다. 극의 클라이막스. 곡 하나에 두 사람이 몰두하며 곡의 끝을 향해 나아간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대화를 지나 치닫는 비극적 결말은 마음 한 곳을 저리게 만들었다.
검은 옷의 살리에리와 흰 옷의 모차르트의 모습은 대비되었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이 만들어낸 호흡은 숨을 참고 그들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내가 숨쉬기를 멈춘 것처럼 살리에리도 그와 함께 몰입하는 순간만을 기다렸던 건 아닐까?
복잡하고 추악하기는 하지만, 살리에리의 감정도 하나의 사랑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극 내내 모차르트가 입은 흰 옷은 그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 살리에리가 입은 붉은색, 은색 옷은 욕망을 가리키듯 다른 존재인 그들이 뒤섞이는 순간은 이 작품의 어느 장면보다 인상적이었다.
혹은 신에 대한 지나친 갈망
다소 납작하게 다가오지만 단지 신에 대한 잘못된 사랑일 수도 있다.
살리에리에게 음악은 신의 뜻을 전하는 언어였고, 평생을 신을 위한 음악을 만들며 금욕적으로 생활해 왔다. 그와 다르게 모차르트는 지저분한 농담을 쉽게 올리는 인물이었다. 신이 말하는 율법과도 멀었다. 그럼에도 신은 그 언어 능력을 자신이 아닌 모차르트에게 준 것이다. 살리에리에게 모차르트는 '신이 선택한 사람'으로 보였다. (아마데우스의 뜻이 '신의 사랑을 받는 자'이기도 하다.)
모차르트의 모습을 보며 살리에리는 돌변해 하늘을 향해 외친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적입니다."
악플러보다 무서운 게 돌아선 팬이라는 말이 있다. 신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를 등져 버린 살리에리의 어긋난 사랑이 비극을 낳았다.
한편 살리에리를 보며 이런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없을까
“욕망을 주셨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죠!”
살리에리는 천재인 모차르트를 보면서 음악에 대해 끝없이 욕망하게 해 놓고 재능은 주지 않은 신을 원망하며 분노한다. 그 분노는 앞서 말한 바와같이 신을 등지게 만들었고, 피해는 고스란히 모차르트에게 표상되었다.
에디슨의 명언이라 알려진 말이 하나 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천재 또한 99%의 노력을 한다는 말로 보이지만 다르게 읽으면 99%의 노력을 하더라도 1%의 영감이 없다면 천재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 명언은 <아마데우스> 속 살리에리의 몸을 관통한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무언가 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은 것처럼.
작품을 보면서는 '이길 수 없다'고 단정하게 된다. 부정적으로 보일 테지만 살리에리가 아니더라도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노력하는 자, 재능 없는 평범한 자가 가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인정을 살리에리는 작품 끝에서 전해준다.
그래서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가 왜 세계적인 작품인지, 이번에 직접 보고 나서 깨달았다. <아마데우스>는 분류가 연극이지만 음악가들을 다룬 탓에 ‘넘버’가 없을 뿐 뮤지컬만큼이나 곡 사용이 잦다. 모차르트의 곡인 작은 별 변주곡,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등 피아노 연주곡과 오페라, 살리에리의 곡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넓은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으로 작품은 더없이 풍성해졌다.
<아마데우스>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원작이자, 피터 쉐퍼의 희곡을 근원으로 하는 작품이다. 실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생전의 명성은 모차르트보다 뛰어났으며 성격도 모차르트보다 사교적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왜 모차르트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을까?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모차르트가 사망한 뒤에 그가 유명해지면서 그의 죽음의 배후에 살리에리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모차르트 생전에 성격적인 차이가 있었고, 살리에리의 치매가 심해졌을 때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말을 외치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그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에 힘을 실었고, 정말로 그가 모차르트를 죽인 듯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설’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처지나 성격을 보았을 때 실제로 독살했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전해진다.
사실을 배제하고 작품만 보았을 때, 신과 인간의 갈등이나 한 인간의 욕망, 질투, 그리고 어쩌면 사랑 같은 감정선을 엿보기에 너무나 좋은 작품이다. 음악까지 함께 하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숭고한 마음이 돌아서며 비극으로 이어지는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는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 전 살리에리가 관객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가 누군가에게 품는 시기나 질투, 이기심 등을 용서한다고 한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그가 나와 같은 분야에서 나보다 뛰어날 때 나도 모르게 질투심을 갖곤 한다. 최근에도 그랬는데, 좋아하면서도 그런 마음을 갖는 내가 싫었다. 그 문드러진 감정을 이해받고 온 기분이다. 의미 없는 용서일지라도 "그럴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달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내 모습이 싫다. 앞으로도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데우스>를 본 후 하나의 해결책을 찾기는 했다. 그 사람을 지금보다 더 많이 좋아하는 것. 혹은 사랑하는 것.
살리에리도 모차르트와 그의 재능에 대한 사랑을 긍정했다면 그는 어떤 결말을 맞았을까? 모차르트가 요절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마데우스>는 허구적인 이야기지만 여러 생각을 펼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