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빛나는 재능을 질투해 본 적 있는가?
그 대상의 불행에 남몰래 입꼬리를 올렸던 적은?
이 이야기는 고개를 끄덕인 당신을 위한 이야기, [아마데우스]다.
연극 속 살리에리는 긍지 높은 사람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신에게 그렇게도 성실하게 기도하고, 신을 위한 음악을 만든다. 그는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은 도구임을, 신의 무언가를 이 지상에서 실현할 사람으로 간택 받았음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1막의 중반, 그는 신으로부터 배신당한다. 분명 나를 도구로 선택해 선택했으면서, 나를 지금껏 이 궁정 음악가라는 지위까지 키워주었으면서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재능을 만들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저 천박하고, 어리고, 분수도 모르게 행동하는 모차르트에게! 독실한 종교인은 벼락처럼 내리치는 배신감에 온몸을 비틀며 절규한다.
질투와 열등감
이후에 이어지는 2막의 줄거리야 뭐 연극을 본 사람이라면 전부 다 알 것이고, 이 글에선 살리에리라는 인물에 대한 나의 감상을 적어보고 싶다.
남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소탈해지려고 하지만, 사실 나는 질투가 많은 사람이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을 때 더더욱. 내가 쪼잔해지는 부분은 대부분 재능이다.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 나보다 말을 더 잘하는 사람. 나보다 더 조금 더 무언가를 갖춘 사람들이 가끔 그렇게 미울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연극을 볼 때 주인공과 내가 그렇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살리에리는 ‘질투’라는 단어를 인물로 빚어낸 무언가였으니까.
질투라는 건 사람을 참 귀엽게도, 추악하게도 만든다. 무언갈 쉽게 질투한다는 건 다른 사람의 장점을 빠르게 파악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머, 00을 참 잘하시네요!” “가지고 계신 00이 정말 예뻐요!” 내 감정만 빠르게 추스른다면, 사실 사회생활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사람이 안으로 곱아들기도 어렵지 않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내게 없는 것’을 자꾸 알아다가 보면 사람이, 자세부터 위축되기 시작한다. 마음이 좁아지고, 괜히 이런저런 원망을 주워섬기게 되어, 어느새 사람을 참 쉽게 미워하게 된다. 요컨대, 사람 보는 눈이 좋을수록 질투가 샘솟기 좋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살리에리는 최악의 상대를 만난 셈이다. 극상의 재능을 알아보는 귀라니, ‘그’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같은 긍지 높은 인간에게 이보다 더한 벌은 없을 테니까.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순간 질투와 배신감, 원망에 휩싸이는 살리에리는 꼭 내가 몇 년간 쌓아온 질투와 열등감을 한 번에 팡 터뜨리는 것처럼 절규한다.
이 부분에서 문유강 배우가 참 좋은 배우라고 느꼈던 것이, 절규하는 성인 남성을 상대로 여성인 내가 위협이나 지루함 아닌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참 어려운데 그걸 해냈기 때문이다. 특히 살리에리와 같은, 나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인간을 연기하면서 말이다.
종교라는 건 뭘까
앞서 계속해서 이 사람이 ‘종교인이다’,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을 적으로 돌렸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만큼 인상적인 특징이어서 그랬다. 나에게 살리에리의 신실함은 굉장히 낯선, 불가해한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신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무언가를 사용했던 적은, 글쎄, 중학생 시절 찬양대에서 기타를 쳤을 때가 전부였을 것 같다. 교회를 나온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신’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오히려 유신론자들의 논리를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이며 흥미로워했다. 자꾸만 내가 없는 것을 가진 인간들이 너무 많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신이 나의 적이 된다’라는 것은 굉장히 낯선 개념이다. 보통 무언가를 적으로 돌린다는 건 그만한 기대와 해묵은 감정이 있을 때 가능하니까. 1막의 마지막, 살리에리의 절규를 들으며 배우의 연기에 감탄함과 동시에 ‘저런 사람도 있단 말이야?’ 생각하며 경악했었다. 뿌리 깊은 질투와 열등감이 증오로 바뀌어 모차르트를 망가뜨리기 위해 인생을 바치고, 이를 본인이 유도했음에도 종래엔 ‘내가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었구나’라며 죄책감에 몸서리치는 장면도 그의 신앙심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여 신기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과 살리에리
이미 끝난 이야기, 처음부터 죽기 직전의 완결된 서사로 시작하는 살리에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궁금증은 하나다. 그에게 모차르트라는 사람은 어떤 존재였을까? 문득, 살리에리는 신을 적으로 돌린 사람이지, 모차르트 개인을 향해 ‘천박하고 엉덩이 가벼운 애송이’라는 것 외의 어떠한 감상을 뚜렷이 내뱉은 적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아마데우스’, 신에게 축복받은 그 재능을 끝없이 숭배하고 질투하여 곧 혐오했지만, 그에게 모차르트는 무엇이었나? ‘재능을 부여받은 신의 도구’ 이상의 무언가였을지가 끝내 궁금하다.
모차르트가 죽기 직전, 살리에리는 후회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내가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었다”라며 통한한다. 그러나 이 후회가 모차르트를 향한 죄책감인지, 자신의 맹세를 어기어 이토록 타락한 살리에리 본인을 향한 절망인지를 모르겠다. 보통은 죄책감이라고 해석하겠지만, 그 뒤에 이어진 대사가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나를 용서해”
용서해‘줘’가 아닌 ‘용서해’.
살리에리에게 모차르트는 신의 대리자, 혹은 도구였지 영원히 하나의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한다. ‘나의 죄를 용서하사’라는 건 신에게 하는 말이지 인간에게 하는 말이 아니니까. 모차르트는 그에게 끝까지 아마데우스였던 셈이다.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살리에리는 정말로 불쌍한 인간이다. 존재하는지도 이생에선 알 수 없을 존재와 평생을 전쟁한 셈이니. 나의 질투와 열등감은 인간을 향한다. 감정의 승화 또한 ‘우리는 결국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에서 온다. 그러나 그의 증오는 어디로 올라갈 수 있나? 끝까지 그의 발목을 붙잡고 괴롭히는 것이다. 신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자 이 이야기의 제목이 아마데우스인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