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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는 연극 ‘아마데우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린 영원한 적입니다.”

 

연극 ‘아마데우스’는 18세기 빈을 배경으로 궁정 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서사를 그려낸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소문에 작가 피터 셰퍼(Peter Shaffer)의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져 탄생한 이 작품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파멸의 필연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본 작품은 토니 어워즈에서 최우수연극상을 비롯한 5개 부문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동명 영화로 재탄생해 아카데미상 8관왕에 오르며 현대 연극사에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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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2018년 초연 이후 꾸준히 재연되고 있다. 올해로 네 번째 시즌을 맞은 2025년 공연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9월 16일부터 11월 23일까지 올려질 예정이다. 주인공 살리에리 역에는 박호산, 권율, 김재욱, 문유강이, 모차르트 역에는 김준영, 최정우, 연준석이 출연해 각기 다른 해석의 ‘아마데우스’를 선보인다. 특히 김재욱은 2018년 초연 당시 모차르트 역을 맡은 바 있으나, 7년 만에 살리에리로 돌아왔다. 캐스트 조합에 따라 달라지는 무대가 이번 시즌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듯하다.

 

 

 

살리에리의 고해성사


 

암전된 무대에 휠체어를 탄 노인이 등장한다. 안토니오 살리에리다. 그는 관객을 향해 자신의 죄에 대해 고해성사하기 시작한다.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삶, 그로 인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한다. 마치 심판대 앞에 선 듯 스스로를 변호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이기보다 구원을 향한 절박한 호소에 가까웠다.

 

18세기 오스트리아 빈, 평범한 시골 출신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독실한 신앙심과 부단한 노력으로 황실의 궁정 작곡가 자리에 오른다. 재능과 순결을 바쳐 당대 최고의 음악가가 되는 것이 그와 신(God) 사이의 거래였다. 그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 순간 절제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약속은 성취되는 듯 보였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작은 바람들이 불어와 ‘소식’을 전한다. 신의 은총을 받은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가 오스트리아에 왔다는 것이다. 살리에리는 그의 실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모차르트는 무례하고, 경솔하며, 방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만큼은 신의 창조물이었다. 살리에리는 신의 징계를 받을만한 '천박한 젊은이'의 손끝에서는 완벽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자기의 생을 다 걸고서도 도달할 수 없었던 '무결한 음악' 앞에 살리에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더 참담한 사실은 자신에게 모차르트의 재능을 ‘알아보는 재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신을 원망했고, 끝내 그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삶을 망가트리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본능적으로 모차르트의 음악에 이끌려 음악이 연주되는 곳마다 빠짐없이 참석하지만, 그의 성공을 돕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악행보다 방관으로 서서히 그를 고립시킨다. 결국 모차르트는 지속되는 생활고와 지병으로 인해 생을 마감한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평범’이라는 수식어를 벗기 위해, 그의 죽음에 ‘참여’하기로 한다.

 

 

 

악마의 속삭임, 작은 바람들


 

극을 보는 내내 주역만큼이나 눈에 들어온 배역은 ‘작은 바람들(Little Winds)’이었다. 풍부한 성량과 관객을 압도하는 연기력, 무대의 끝과 끝을 가로지르는 광활함이 진짜 바람 같았다. 긴 러닝타임에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한편, 작은 바람들은 살리에리의 조력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음성은 신난 아이들처럼 익살스럽다가도 음산하고, 때로는 유혹적이다. 마치 선악과로 이브를 꾀는 뱀처럼, 그들은 살리에리의 내면을 간질인다.

 

“첫 교향곡은 5살, 첫 협주곡은 4살, 오페라는 14살”

 

그들은 흥얼거림은 살리에리의 질투심을 자극한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반복해 상기시키며, 젊은 신인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게 한다. 때로는 달콤한 찬사로 살리에리를 드높였다가도 차가운 현실로 추락시킨다. 악마는 가혹하게 채찍질만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당근의 탈을 쓰고 교만, 탐욕, 분노 같은 죄악을 교묘하게 종용한다. 그리고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기파괴’다.

 

 

 

신에게 사랑받은 자는 누구인가


 

모차르트의 미들 네임, 아마데우스는 ‘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이름과 그의 삶은 극명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모차르트의 재능은 신의 선물이었지만, 그의 생은 가난과 질병, 오해로 얼룩져야만 했을까. 누군가는 모차르트의 불행이 그의 성품 때문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리에리의 논리대로라면, 재능을 주었다면 그에 걸맞은 성품도 주어야 했다.

 

인간의 눈은 가진 9할보다 결핍된 1할에 닿는다. 그것이 욕망의 시작이다. 살리에리는 자신이 가진 것들—부, 명예, 순결, 성실함, 안정—을 은총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가 바라본 것은 ‘자기에게 없는’ 재능뿐이었다. 인간이란 모르는 것을 갈망할 수 없고, 가진 것을 욕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결국 최고의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살리에리의 바람은 ‘천재 음악가의 죽음에 관여’하고 싶다는 뒤틀린 욕망으로 변질된다.

 

모차르트의 비참한 삶을 보면 도대체 누가 신의 은총은 받은 자인지 알 수 없다. 재능 앞에서 ‘주어진 평화’는 이토록 값싼 것이 된다.


 

꽃들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제비꽃은 결코 진달래를 부러워하지 않고, 진달래는 결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진정 나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저는 신이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언제나 그 선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신이 저에게 주신 재능은 더욱더 노력해서 살리지만,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탐내거나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정호승,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됩니다」 中

 

 

살리에리가 평범한 사람들의 수호자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대로 평범함까지 뺏길 수는 없다. 다만, 그에게 정호승 시인의 위로를 남긴다. 욕망이란 우리를 괴롭게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삶에 재미를 선사한다. 남의 삶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삶에 관심이 없다. 욕망은 자기 삶에서, 자기 삶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이 작품 또한 욕망 없이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은 인간의 욕망을 허용한다. 때론 침묵한다. 모든 인간이 유혹받지만, 모두가 그 속삭임에 넘어가는 건 아니다. 자유의지를 발휘하라.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욕망을 지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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