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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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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너와 나의 5분'(2025)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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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나눠 듣던 5분, 오직 우리 둘만의 시간 2001년.


새로 전학 온 경환은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기만 하다. 좋아하는 일본 음악을 들으며 외톨이처럼 지내던 경환에게 짝꿍이자 반장인 재민이 관심을 보이고, 둘은 음악 취향이 비슷하단 것을 알게 된다.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던 쉬는 시간, 버스 맨 뒷자리에서 이어폰을 나눠 낀 채 음악을 함께 듣던 하굣길, 둘만 아는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던 어느 날, 재민을 향한 마음이 커진 경환이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데…

  

 

 

말하지 못한 마음이 음악이 되어 흐를 때: 너와 나의 5분


 

몇 초의 멜로디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마음속 어딘가를 찌를 때가 있다. 등하굣길 버스 안에서 듣던 노래, TV 속에서 흘러나오던 멜로디 한 소절만으로도 그때의 공기와 설렘이 되살아나곤 한다. 길어야 몇 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음악은 그 속에 가장 선명한 순간을 담아낸다. 잠시간의 틈만 있다면, 언제든 기억을 꺼내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음악의 힘이다. 영화 <너와 나의 5분>은 바로 이 힘을 통해, 한 시대의 공기와 두 소년의 서정을 되살려낸다.

 

나지막한 음악과 함께 스크린이 우리를 데려다놓는 순간은 바로 2001년, 21세기로의 전환기다. 변화의 기운이 세상을 가득 채우던 시기, 영천에서 대구로 전학을 오게 된 경환은 낯선 공간에서 홀로 일본 음악을 듣는다. 모두가 새로움에 들떠 있었지만 그것이 곧 낯선 것에 대한 관대함이나 수용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취향이나 감정은 미처 꺼내보일 수 없었다. 당시 J-POP은 비주류의 영역이었고, 반 아이들은 일본 음악을 즐겨 듣던 경환을 '오타쿠'라며 비웃기도 한다. 그렇게 음악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던 경환에게, 반장이자 짝꿍인 재민이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두 소년이 처음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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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경환의 MP3에 담겨있던 건 90년대 J-POP의 전설이라 불리는 밴드 'globe'의 음악이었다. 낯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재민은 이를 단번에 알아챈다. 'globe'의 음악 중 제일은 'Depatures'보단 'Faces Places'라며 장난스런 시비를 거는 재민. 이누야샤보다 원피스가 좋고, 코난보다 김전일이 좋다는 재민은 그렇게 경환과 애정어린 투닥거림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친구가 된다.

 

우연히 알게 된 비슷한 취향을 바탕으로, 경환과 재민은 둘만의 추억을 쌓아간다. 정류장에서, 버스 맨 뒷자리에서, 서로의 이어폰 한 쪽을 나누며 같은 음악을 듣던 짧은 시간. 그 5분은 단순한 시간적 단위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오래된 필름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따뜻하고 아련한 화면, 조금은 먹먹한 음질의 음악. 20여 년 전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장면들과 함께 두터워지는 두 사람의 유대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 시절의 몽글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너와 나의 5분'이 특별한 이유는, 영화가 단순히 청춘의 한 장면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데서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경환과 재민의 감정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련한 추억’이지만, 동시에 그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낼 수 없었던 당대의 퀴어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재민과 같은 버스를 타기 위해 먼 길을 둘러가는 경환, 왜 자신을 자꾸 챙겨주냐는 경환의 물음에 그저 '너니까'라는 대답을 내놓는 재민, 거리감이 가까워질 때마다 흠칫 놀라는 경환의 모습과 함께 생겨나는 긴장감.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장면들의 감정선은 분명 풋사랑의 설렘과 긴장감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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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각별히 자신을 챙겨주는 재민에게 마음을 열고, 어느날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 경환. 경환은 동성 친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들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미 경환은 재민에게 수 차례 자신들이 어떤 관계인지를 묻는 듯한 말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재민에게 제 민감한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곧 그에게 넌지시 건네는 고백의 일종이기도 했다.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이지, 그래서 비슷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왔던 거지, 그렇지?

 

그러나 재민은 혐오스럽다는 듯 경환에게 화를 내고 돌아선다. 이윽고 경환이 동성 친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져, 경환의 학교 생활은 곧 지옥처럼 변한다. 돌변한 재민의 태도는 분명 충격적이다. 경환 역시 그런 재민의 모습에 큰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영화는 곳곳에서 재민의 상황을 통해 그런 행동의 이유를 암시한다. 재민 또한 과거에 괴롭힘을 당한 아이였던 것이다. 다만 그는 그 괴롭힘의 이유를 끝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관객은 짐작할 수밖에 없다. 재민 역시 경환과 같은 마음을 품었고, 같은 공포 속에서 살아왔음을.

 

재민은 이미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지, 그것이 자신과 주변에 어떤 상처를 남길지를. 엄격한 새어머니 밑에서 ‘모범적인 아들’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모두에게 인정 받는 반장이자 친구로 남고 싶다는 바람 속에서, 그는 결국 경환을 밀어낸다. 경환이 괴롭힘을 당할 때조차, 재민은 그 곁을 지키지 못한다. 오히려 침묵한 채, 경환을 손가락질하던 평범한 사람들 속으로 숨어든다. 경환의 마음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부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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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격변하는 21세기의 초입. 변화는 필연적으로 무언가의 소멸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재민의 침묵과 함께, 경환을 둘러싼 세계 역시 모두 무너지며 변해간다. 평화롭던 학교 생활은 괴로워지고, 친구들과 즐겁게 놀던 극장은 문을 닫고, 재민과 함께 방문했던 음반 가게는 지하상가 재개발로 인해 문을 닫는다.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던 경환의 어머니도 재개발의 여파를 이기지 못했고, 경환과 어머니는 대구에서의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힘겨워하는 경환을 바라보는 재민 역시 예전 같은 생활을 이어나가지는 못한다.

 

결국 대구를 떠나게 된 경환. 하지만 재민도, 경환도 서로를 향한 아련한 마음을 끝내 지우지는 못했다. 경환은 문을 닫기 직전인 음반 가게에서 마지막으로 'globe'의 앨범 한 장을 산다. 자신의 농구 연습을 도와준 재민에게 언젠가 선물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사이가 틀어진 후에도, 경환은 이것만은 재민에게 전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경환의 이사 소식을 알게 된 재민 역시 경환에게 만날 장소를 적은 짤막한 쪽지를 남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각자의 방식으로 ‘마지막 인사’를 준비한다.

 

대구에서의 마지막 밤, 경환은 재민과 자신을 이어주던 'globe'의 곡과 함께 길을 나선다. 눈 속에서 재민을 향해 달려가는 경환, 그 진심 가득한 발걸음을 'Departures'의 선율이 감싸안는다. 영화는 끝내 말하지 못한 진심을 음악의 선율로 대신 전하며, 서로를 향한 마음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을 더욱 단단히 붙들어맨다. 언제나 둘을 이어주었던 '5분'은 마지막 순간에도 어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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凍える夜待ち合わせも 出来ないまま明日を探してる

 いつだって想い出をつくる時には あなたと二人がいい


얼어붙은 밤, 만나지 못한 채 내일을 찾아 헤매고 있어

언제라도 추억을 만들고 싶을 때는 당신과 둘이서가 좋았어요

 

globe - Departures 중



누구에게나 아련한 추억은 있다. 그러나 그 소중한 추억을 끝내 감춰야 했던 이들에게, 그 기억은 더욱 선명하고 아프다. 함께한 '5분'이 선연한 추억을 담아내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경환과 재민처럼. 그런 모두를 위로하듯, 지나간 시간과 꺼내지 못한 마음을 되살려 이어주는 영화 '너와 나의 5분'. 마음 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재생되고 있을 그 시절의 5분을 함께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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