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연휴라 불리는 2025년 최장 10일 연휴의 시작. 그 첫날, 나는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관을 자주 찾는 나로서는 이번 풍경이 이색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코로나 이전을 방불케 하는 시끌벅적한 영화관, 상영관마다 빼곡히 들어선 관객들.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반갑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예매 전부터 그 열기는 이미 느껴졌다. 평소라면 미리 예매를 해두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당일 예매를 하게 됐다. 전날까지만 해도 분명 상영관은 텅텅 비어 있었다. 역시 연휴라 해도 별 수 없나, 그 전날 혼자 넋두리를 늘어놓았었는데. 막상 당일 예매 창에 들어가 보니 저녁까지의 좌석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늘 좋은 자리를 선점하던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어제의 한숨을 도로 들이마시게 만드는 반가운 광경이었다. 이 황금연휴라 불리는 기간에 사람들이 택한 건 다름 아닌 영화관이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의 중심에는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있었으니.

〈어쩔수가없다〉는 한국 영화계의 거장인 박찬욱 감독이 2022년 작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어쩔수가없다… 어쩔수가없다… 묘하게 구미를 당기는 제목이다. 10년 전, 아니 바로 코로나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계에는 ‘제목이 두 글자여야 흥행한다’는 루머 아닌 루머가 돌았다. 실제로 〈군도〉, 〈암살〉, 〈해적〉 같은 영화들이 그 시절 극장가의 호황을 이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팬데믹을 지나며 그 공식은 오래전에 무너졌다. 코로나 이후 불황기를 겪으며 그 어떠한 흥행 공식도 더 이상 별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몸소 체감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어쩔수가없다〉는 탁월한 선택의 제목이었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일상에서 밈처럼 되새길 수 있는 유쾌한 제목이자 박찬욱 감독이 원래 구상했다던 〈모가지〉나 〈도끼〉와 달리 이번에는 박찬욱 영화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희망과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제목일 테니.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역시 박찬욱 영화는 어쩔 수가 없구나”. 긍정적이라면 긍정적이고, 부정적이라면 부정적으로 들릴 말이다. 실제로도 이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결국 또 박찬욱답다’는 의미와 ‘그래도 역시 박찬욱이다’라는 의미. 그는 이번 작품 개봉을 앞두고 여러 예능에 출연하며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섰다. 바로 전작 〈헤어질 결심〉이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흥행을 거두지 못했던 만큼 그 간극을 메워야 한다는 부담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저는 언제나 천만을 노렸다”고 말하는 장면만 보아도 이 감독이 얼마나 흥행에 진심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박찬욱 감독의 팬이라면 아쉬울 부분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다르게 생각하면 이번 작품이야말로 그가 대중을 향해 한 걸음 먼저 다가선 영화이기도 하다. ‘박찬욱 영화 중 가장 유머러스한 작품’이라는 말이 괜히 도는 게 아니다. 나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내가 있던 상영관만 해도 맨 앞자리부터 맨 뒷자리까지 관객이 빼곡히 들어서 오랜만에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웃으라고 던진 신호에 관객은 정확히 웃음으로 응답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화장실, 엘리베이터 등 곳곳에서 〈어쩔수가없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찬사와 비판이 뒤섞인 그 소란조차 박찬욱 감독이 바랐던 그림이 아닐까 싶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쨌든 '흥행'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 작품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흥행을 위해서는 어쩔수가없다

하지만 그 대중성을 잡기 위해 박찬욱 감독이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한 흔적들도 분명히 보였다. 그의 영화를 몇 편만 본 사람이라면 이번 작품의 결이 이전과 다르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 정서경 작가와 호흡을 맞춰왔다.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헤어질 결심〉까지 총 다섯 편의 작품을 공동 집필하며 독자적인 톤을 구축해 왔던 바가 있다. 정서경 작가 이전의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가 전반적으로 거친 톤이라면 이후의 작품들은 훨씬 더 섬세하고 정교한 면들이 돋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아가씨〉와 〈헤어질 결심〉으로 이어지는 시기가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학이 가장 절정에 달했던 순간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품은 타협 없는 과감한 터치, 변태적 미감에 가까운 디테일, 한 줄씩 뜯어 음미할 만한 대사들 같은 특유의 장점이 다소 희미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투자・배급사인 CJ ENM의 개입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작 〈헤어질 결심〉 역시 같은 배급사였음을 떠올리면 이를 주원인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오히려 개입보다는 부재에서 오는 공백의 결과로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눈에 띄는 건 수위의 변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잔혹한 장면도, 노골적인 정사신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전의 그라면 한 번 더 밀어붙였을 순간에도 이번에는 놀랍게도 중간에 멈춰 서는 듯했다. 그러니 이번 영화는 굳이 마음을 단단히 먹거나 지레 겁을 먹고 볼 필요 없이 극장을 찾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박찬욱 영화인 건 어쩔수가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여전히 박찬욱 영화로 느껴지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야기의 구조와 표현 방식이 여전히 대중에게는 다소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의 손길을 거친 영화는 결국 다르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부터 보자. 영화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도끼」를 원작으로 한다. 해고된 중년 남성이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중성을 위해 어느 정도 절제했을지라도 결국 이야기의 종착지가 살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물론 그 행위 자체가 영화의 전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주인공의 범행 동기에서 보이는 모순까지 더해져 관객이 느끼는 거부감을 완전히 지우긴 어려워 보인다. 또 중간중간 나오는 장면들은 누군가에게 찝찝함 혹은 불편함을 안길 수도 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밝혀온 인터뷰를 떠올리면 이 영역이 그의 영화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요소만으로 영화를 규정할 수는 없다. 〈어쩔수가없다〉는 노골적인 해학극이다.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범행의 전개가 아니라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과 그를 대하는 주변인들 반응이 어떻게 변해가는가 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처럼 주인공의 심리와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 그 상황의 모순을 바라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한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의 발현, 가장이라는 이름이 부여한 잘못된 남성성,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뒤틀린 신의, 그리고 현대 노동 시스템이 마주한 현재와 미래의 문제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치밀함에서 거장의 면모가 드러난다.

특히 영화 제목 ‘어쩔 수가 없다’는 극 중 주인공 만수(이병헌)가 범행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일종의 주문이자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언어로 사용된다. 마침표가 찍힌 이 평서문은 영화가 끝나고 관객을 향한 의문문으로 되돌아간다. 정말 어쩔 수 없었는가? 실직이라는 현실을 맞닥뜨린 주인공 만수가 살인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만수와 같은 이들을 대량으로 내모는 현대 산업 구조.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인간이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 하에 자초해 낸 비극은 아닐까?
“실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게 문제라고!”
“돈을 못 벌면 집이라도 팔아! 마트 가서 짐이라도 날라!”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묻고 있다.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음에도, 왜 늘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구원하려 하는지. 또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기로에 서 있는 지금, 영화는 그 경계 위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덮어온 우리의 선택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