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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면, 허공에서 단어와 단어를 잇는 일이 가장 어렵다. 글감이 나라니? 아, 참 곤란하다. 글에 대한 욕심은 있어서 ‘일단 쓰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막상 내 버킷에서 리스트를 퍼 올리려 하니 키보드 위에 얹은 손가락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막막해질 때는 어학사전만큼 좋은 꼼수가 없다.
내가 쓰려는 그 카테고리의 정체를 다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뭉텅이를 풀어내는 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지금도 그렇다. ‘버킷리스트’라는 다섯 글자가 하나처럼 꽁꽁 묶여 있었는데, 이제는 ‘버킷’과 ‘리스트’로 나눠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단어의 기원은 중세 시대, 목에 밧줄을 감고 양동이를 발로 차 버리던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결국 세월이 흐르며 점점 어딘가로 향하는 버킷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이며, 뻥—예상치 못한 순간 그 버킷이 걷어차이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이냐는 물음 아닌가. 아, 잔인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매우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매 순간의 선택을 되돌아보자. 얼마나 풍족한가? 해야 할 일을 굳이 미루기도 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외면하기도 하며, 시간과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는데도 ‘내 것이 아닐 거야’라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여러 영상 매체를 보면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었거나 무언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그냥 하라고. 뭐가 그리 말이 많냐, 그냥 해라!
나 역시 그 말을 떠올리며, 예전보다 뭔가를 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건 누가 시켜서는 절대 못한다는 걸 나도 잘 안다. 그런데 언제까지 내가 평화롭게 글만 타닥거릴 수 있을지 모르니, 계속 쓰게 된다. 더군다나 내가 다루는 분야가 공연 매체다 보니, 타인의 예술 활동을 감상하고 글로 옮겨내기까지는 늘 보이지 않는 마감기한이 따라붙는다.
너무 오래 미루면 처음 품었던 열망이나 꼭 써야 한다고 다짐했던 키워드들이 쉽게 사라져 버린다. 결국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면 조금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게 때로는 부담스럽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이 약간은 긴장감을 가지고 움직일 필요도 있지 않은가.
다만, 이미 한국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춘 속도감에 ‘빨리빨리’ 텐션까지 더해졌는데, 스스로 원하고 이루고 싶은 일 앞에 서니 오히려 더 급해지고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 같다.
무섭지 않은가. 지금은 이렇게 평화롭게 글 위에서 중얼거리고 있지만,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이 모니터도 힌트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냥 불안해하며 위험한 춤을 출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전혀 후회는 되지 않는다. 가끔 예상치 못한 긍정적 피드백이 돌아오니, 틀린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굉장히 단기적으로는 건설적이지 못한 판단처럼 보이지만, 분명 장기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듯한 느낌. 이것이 지금의 나다.
결론은, 하고 싶은 걸 아주 미치도록 하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고? 언제 할 수 없는 상황에 떨어질지 모르니까.
죽음이나 불편한 기분은 언제든 순식간에 찾아온다. 그래서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들이 부재할 때, 황급히 글을 쓰고 공연을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버킷은 지금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데, 또 다른 빈 공간엔 무엇을 채워 낼지도 고민해야 한다. 아, 이 배부른 삶. 이 버킷리스트를 적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 버킷리스트다!
내 소원이 적힌 양피지를 타인 앞에 펼쳐질 수 있게 해주는 이런 기회가 어디 있나? 또다시 열심히 생각의 동앗줄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다. 그래, 나는 죽기 전에 무엇을 하고 싶을까? 딱 30개만 떠올려 보기로 했다. 어디, 나열해 볼까?
![[크기변환][포맷변환]IMG_840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30164609_wxzyvqpf.jpg)
능숙한 드라이버가 되어 엄마, 아빠랑 어디 먼 카페에 가 보고 싶다. 혼자 통영에 가도 괜찮겠다. 사진 찍을 때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잇몸 미소는 금지, 아무리 해도 웃지 않는 눈 모양도 금지.
최애 버전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싶다. 결국 바이올린 입문곡은 이 곡 아니던가. 클래식 연주를 언젠가 누워서 들어 보고 싶다. 진짜, 냅다 이불 펴 놓고 누워서 듣기. (드르렁 금지, 낯가림 금지) 언젠가는 독일에 가서 연주자들의 학교를 구경하고, 공연도 보고 싶다. 왜 여기가 본고장인지 직접 알아내야 한다.
철봉 하나쯤은 넘어가 보고 싶다. 아직 못 해 봤으니까. 칠순 전에 바이올린을 배워 리사이틀에 도전해 봐야 하나? 올 사람? 제로 떡볶이가 출시되면 냉큼 먹어야지. (탄수화물도 제로로 안 되겠습니까?) 밥을 천천히 먹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동기 언니가 수영장에서 놀고 싶다 하니, 얼른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겠다.
인체 전신을 비율에 맞게 정확히 그려 보고 싶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완벽한 구도로. 수채화도 배우고 싶고, 물감을 자유롭게 던지며 놀아 보고 싶다. 글로 쓰던 감상을 그림으로도 확장해 보고 싶다. 전신 비율! 전신 비율!
책 한 권 정도는 꼭 써야 하지 않을까. 사실상 지금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은 디지털 세상 속이잖아. 글은 한 번만 써도 퇴고할 필요 없이 완벽했으면 좋겠다. (헛소리 금지) 클래식 이론 용어를 단번에 익히는 방법도 터득해 보고 싶다.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다.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에세이로만 채워지는 날들로 매일을 가득 메우고 싶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능숙하게 쓰다듬고 싶다. 어릴 적부터 키워 본 적이 없어서, 막상 다가오면 어렵고 낯설다.
![[크기변환][포맷변환]1070866.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30164645_qbbkzcmc.jpg)
언젠가는 연주자와 함께 악보를 펼쳐 놓고 카페에서 길게 얘기해 보고 싶다. 이 부분에서는 왜 그렇게 해석했는지, 어떻게 연습했는지, 무엇을 중점으로 두었는지, 어떤 부분을 신경 썼는지—진득하게 묻고 싶다.
클래식 연주가들의 리허설 현장도 조용히 구경해 보고 싶다. 아니면 연습 장면이라도. 어떻게 ‘음을 조성해 나가는지’ 그 길목이 궁금하다. 그리고 내가 보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만나 보고 싶다.
늘 사람들을 칭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달래지 않아도, 달달 볶지 않아도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소한 것에 왜곡된 판단을 하지 않고, 크게 편향하여 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작은 것에 상처받지 말자. 되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 자체에서 충만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는 소속을 만들어 내고 싶다. 내가 떠난 후에도 나를 추억해 줄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나를 가장 예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두려워하는 것들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지난날을 귀엽게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기 싫은 일도 빠르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어를 조금은 사랑해 보고 싶다. 하고 싶은 것만 고집하지 말고! (응?) 국제 미아가 될 순 없지 않느냐면서…
![[크기변환][포맷변환]107072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30164843_wzatrkpq.jpg)
이거 봐라, 또 쓰다 보니 소원이 한도 끝도 없다. 왜 이렇게 가지고 싶은 게 많을까? 생각해 보면 젊은 나이에 벌써 안티에이징을 하려는 것 같다. 사실 육신의 노화나 불쑥 생겨 버리는 주름살 한 줄은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연예인도 아니고, 피부과를 수시로 다닐 수도 없고, 그런 쪽에 노력을 기울일 만큼 성실하지도 않다.
그저 조금 더 행하거나, 혹은 행하지 않는 것으로 행동 반경과 주어진 에너지를 조절하며 살아야 한다. 지금 내가 가만히 앉아 할 수 있는 걸 따져 보면, 평소에 계단을 좀 더 자주 오르고, 저녁 식사를 조금 일찍 하고, 산책을 나갈 수 있으면 부지런히 나가고, 무엇을 할 때 가장 마음이 반짝이는지를 찾아다니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늙지 않고 변치 않게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내 동공 안쪽의 정체 모를 동그라미가 아니겠는가.
어릴 적부터 유달리 무미건조하다, 영혼이 없어 보인다—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특히 내가 뭔가 열정을 담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표정은 부처 같다. ㅇ_ㅇ 혹은 -_- 정도의 느낌이랄까. 진심을 담아 타인의 말에 공감하는 중에도, 겉으로는 심드렁해 보인다고 했다.
일단 타고난 생김새가 그렇기도 하고, 진짜 마음에 드는 게 아니면 눈이 번쩍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은 어떤가? 아—빛이 아주 가득하다! 이상한 공연을 봤다거나, 하루에 공연을 연달아 봤거나, 글을 막 탈고한 순간이 아닌 이상 내 눈빛이 쉽게 비지 않는다. 사람들은 쉬는 와중에도 미디어를 놓지 못한다던데, 나는 ‘글은 쓰지 않고 공연만 보겠다’고 다짐한 무대 앞에서도 결국 글을 쓰고 있었다.
쉼이란 뭘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쉴 수 있을까? 막상 “그동안 지쳤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상황에 놓이면, 결국 유튜브라도 켜게 된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는 못하는 셈이다. 쉴 때 잘 쉴 줄 아는 것도 버킷리스트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도 듣지 않고, 무엇을 보지도 않은 채, 그저 재미있는 생각이 잔뜩 떠오르면 좋겠다.
MBTI가 N인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아이디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던데, 나는 전혀 아니다. 토마토를 생각하면 그냥 토마토, 코끼리를 떠올리면 그냥 코끼리. (명상, 참 어렵다)
그냥, 너무 외롭지만 않게 살다가 긴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도 나를 추억해 줄 사람들이 몇 명만 있어도 좋겠다. 떠난 자는 홀로 바람이 되었으니 연민도, 동정도, 분노도, 이별도 느끼지 못하지 않던가. 그냥 ‘아, 살다 갔었지.’ 몇 년에 한 번씩 생각 언저리에 스쳐 주기만 해도 괜찮은 삶이겠다.
그런데 말이다. 느끼지 못할 거라 스스로 말해 놓고도 스쳐 가길 바라는 걸 보면, 아직 이 생에 미련이 가득하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 하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욕심이 이만큼이나 많다.
대체로 행복했으면 좋겠고, 슬픔 앞에서는 슬기롭게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으로 머물다 간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자주 반짝이는 것에 시선을 두고,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이 가득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무리 봐도 내 버킷리스트는 끝이 없으니, 일단 여기까지만 하고… 오늘은 저녁을 함께할 친구에게 작은 선물 하나를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지.
빨리 내려오라 보채는 릴리씨,
생일 축하해요? (하루 지났지만, 내 맘이다!)
얼른 발 나아서 발레하러 가십시다. (난 구경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