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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의 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그 안의 들끓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세계적인 시인이자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 중 하나인 그의 시는, 여성으로의 자의식과 이 세상을 압도하는 어떤 힘, 그에 대항하는 내면의 불꽃을 발화한다.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죽음의 자서전』 등.

 

그는 계속해서 변모하는 세련된 문체와 그럼에도 달라지질 않는 특유의 힘으로 계속해 독자들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들지만, 오늘은 그의 2008년 저서인  『당신의 첫』을 소개하고 싶다.

 

 


1. 궁창


 

 

채석강에 가서 검은 뻘 같은

내 속을 생각했다.


시궁창이여!

시의 궁창이여! 만만세여! 방치된 터널이여!

 

- 시인의 말 中

 

 

그래 여기선 결국 시궁창의 승리! 

시의 궁창이여! 만만세여!

발 아래의 터널이여!


- 「미쳐서 썩지 않아」 中

 

 

궁창이란 성경에서 하나님이 물을 위아래로 나누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하나님은 궁창을 통해 수증기를 경계 삼아 혼돈 속에 있던 지구에 질서를 부여하고, 생명체가 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한다.


즉 ‘궁창’이란 하늘, 대기권이나 우주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혜순이 시인의 말에서 밝힌 ‘시의 궁창’, ‘시궁창’은 앞 연에 놓인 ‘검은 뻘 같은 내 속’이다.


성경의 궁창이 물과 물을 갈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였듯, 김혜순은 이 시 세계에서 ‘나’와 ‘당신’을 갈라내어 새로운 시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중략)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 「지평선」 中

 

 

그렇기에 첫 시로 놓인 「지평선」은 매우 의미심장한 시이다.


나는 내 안에 여러 명의 ‘내’가 있다는 감각을 느낀 적은 없다. 나는 언제나 나였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나’에 대한 이질감은, 나의 ‘연속성’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이루는 세포는 계속해 죽고 또 다른 세포가 생성되고 있다.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르다.


어느 순간 이전의 나는 도저히 나 같지 않다. 만일 ‘나’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상이 아니라 마치 연속적인 하나의 움직임일 것이다. 움직이는 순간 잘못 찍힌 사진처럼, 심령사진처럼.

 

그러나 『당신의 첫』에서 김혜순이 생성하는 다중적인 ‘나’는 이와 다르다. 「지평선」에서처럼, 피가 흐르는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이 깜박일 때마다 갈라지고 생성되는 ‘그것’이 또 다른 나이다.


“하늘과 땅이 갈라”져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것 같은 저녁. 그 어드메의 경계에서 김혜순의 ‘나’는 생성되는 것이다.


눈을 뜨고 ‘주변’이라는 시야를 보는 순간 ‘나’라는 객체가 생성이 되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암흑이 되면,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힌다.


세상을 보는 것, 풍경에게 들키는 것,이 김혜순이 ‘나’라는 몸에서 ‘당신’이라는 새로운 1인칭을 꺼내는 방법이다.

 

 

 

2. 첫


  

 

당신의 첫, 나의 첫,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첫

오늘 밤 처음 만난 것처럼 당신에게 다가가서

나는 첫을 잃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그럼 손 잡고 뽀뽀라도?

그렇게 말할까요?


그리고 그때 당신의 첫은 끝, 꽃, 꺼억.

죽었다. 주 긋 다. 주깄다.

그렇게 말해줄까요?


- 「첫」 中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처음’도 아닌 ‘첫’은 왜 꺼내지는 순간 죽을까?


아주 어릴 적 자주 가던 도서관에서 어떤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도서관은 서가 간의 간격이 매우 좁았고, 그래서 사람이 들어오면 서가에서 책을 고르던 이는 무조건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나는 내가 방금 겪은 ‘첫’ 순간을 재현해 보고 싶었다.


내가 이 서가에 들였던 ‘첫’ 발,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첫’ 책, 그리고 서가 사이 내가 보았던 ‘첫’ 풍경. 물론 그 실험은 실패했다.


아무리 다시 반복해도 발을 내딛는 위치가 달랐거나, 누군가가 지나가거나, 누군가가 자리를 뜨기도 했다. 그때 막연하게 ‘처음’의 그건 영영 다시 가질 수 없겠구나, 싶었다.


바로 그것이 “첫이 항상 죽는” 이유이다. 말하는 순간 내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으로 넘어가니까.


그렇기에 이 시에서 당신의 첫은 나로부터 꺼내지는 순간(그러나 나는 그 당신의 ‘첫’을 갖지도 못한 채), ‘첫’을 잃고 ‘끝’으로 귀결되며, 더 이상 묶이지 않고 그 형태를 잃어간다.


꽃, 꺼억, 죽었다, 주 긋 다, 주깄다로. ‘처음’이라는 명사로 만들어질 시간조차 잘라버리며 명명의 순간 죽어버리는 것이다. 「첫」에서는 ‘당신’이란 나와 구별된 타인에 가까워 보인다.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고 싶어


- 「당신의 눈물」 전문

 

 

「당신 눈동자 속의 물」에서 나는 당신 몸으로 흘러가, 썩자 나와 한강을 향해 시궁창으로 흘러간다. 당신이라는 존재에게 이토록 헌신하는 ‘나’의 모습에서 모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의 눈물」에서 ‘당신’이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알고 보니 내 것인/물 한 꾸러미”는 ‘물끄러미’에서 변주된 말이다. 여기에서 굉장히 재밌는 점이, ‘당신’이 나를 보는 순간이 내가 썩어 시궁창으로 흘러가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앞서 얘기하였던 「지평선」과 연계하여 읽었을 때 이 시점이 굉장히 묘하다. 시궁창이라는 물의 세계와 당신이라는 육신의 세계가 위아래로 서로 마주하고 있고, 그것이 결국 모두 나라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아래 구조가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형상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여성적인 목소리가 ‘당신’을 사랑하되, 기죽지 않는 것이 굉장히 감동적이다.


「미쳐서 썩지 않아」라는 제목이 주는 강렬한 힘.

 

썩어가더라도, 흘러가더라도, 결국 시궁창의 승리! 만만세여! 라고 외칠 수 있는 이 목소리는 김혜순의 시 세계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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