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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얼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얼굴>은 40년 전 실종된 아내이자 어머니 '정영희'의 백골 사체가 발견된 후, 영희와 함께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일했던 이들의 기억을 따라가며 영희의 죽음에 대해 추적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얼굴>은 갑자기 사라진 개인의 죽음을 추적하는 동시에, 정의와 진실이 어떻게 침묵과 외면 속에 지워져 왔는지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희생되어야 했던 불편한 정의
40년 동안 잊혀진 얼굴, 영희의 사진을 요구하는 동환에 영희의 가족들은 "영희는 얼굴이 좀 못생겼거든." 하며 사진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못생겼다, 괴물같이 생겼다, 똥걸레와 같은 외모 평가를 쏟아내며 영화를 시청하는 관람객들에게 불쾌함을 안기고 동시에 영희의 얼굴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한다.
평생을 그런 조롱을 들으며 살아온 탓에 소심하고 위축된 태도로 살아왔지만,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 정의로웠던 영희였다.
정말로 괴물 같았던 건, 아버지의 외도를 폭로했다는 이유로 딸을 때린 어머니, 집안을 풍비박산 냈다며 영희를 탓하는 언니들, 영희의 죽음을 그저 흥미로운 취잿거리로 생각하는 PD,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못생겼다'라는 말로 영희가 받는 취급을 정당화하는 모두였다.
연상호 감독은 영희를 두고 '희생되어야 했던 불편한 정의를 의인화한 캐릭터'라고 말했다. 영희의 정의는 결국 다른 사람들에겐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었고, 모두가 침묵하는 실태를 고발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영희에 대한 낙인과 혐오로 돌아갔다.
아름답고 추한 것
내가 뭐 아름다운 거 추한 거 그런 거 구분 못 할 것 같아? 아름다운 건 존경받고 추앙받고, 추한 건 멸시당해.
앞을 보지 못해 평생을 멸시당하며 살아왔지만 '아름다운' 글씨를 파며 장인의 경지에 이른 영규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영희와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결국 영희 내면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보지 못한 채, 사람들의 눈과 입으로 구분된, '추한' 영희를 살해하고 만다. 멸시의 피해자가 결국 가해자가 된 순간이었다.
못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것이 뭔지 모를 거다. 아니야. 일종의 오해야 오해. 우리같이 못 보는 사람일수록 아름다운 게 뭘까 정말 많이 생각해.
정말 많이 생각한 결과가 그런 결말이었다.
처음엔 영희의 선함에 끌렸지만 결국 결혼을 결심한 것도 영희가 예쁘다며 부추긴 주변 사람들의 장난 때문이었고, 그 관계를 끊어버린 것도 영희를 평가하는 친구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영희의 정의로움과 선함은 '못생겼다'라는 평가 한 줄에 지워졌다. 손끝으로 만져보며 자신이 판 글씨가 예쁜지 아닌지 판단할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같이 살기까지 한 아내의 얼굴을 만져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저 사람들의 시선 하나로 자신을 향한 멸시와 열등감으로 인한 분노가 자신을 가장 존중해줬던 영희에게로 향했다.
결국 아름다움이란 꼭 외면에만 해당하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희생되어야 했던 영희의 정의 역시 당시 사람들에겐 외면하고 싶은 '추한' 정의였던 걸지도 모른다.
시각장애인으로서 받아온 핍박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같은 핍박을 받아온 사회적 약자에게 또 다른 가해자로서의 태도를 가지게 된 점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온 열등감에서 나온 자기방어이자 과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영희에게서 자신을 보았고, 자신이 받았던 따뜻함은 잊은 채 모든 멸시를 영희의 탓으로 돌리고 그녀를 향한 사회적 낙인에 동조한다.
심연 속으로
"아버지랑 닮았네요."
모든 걸 고백하며 넌 날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아버지에게, 이해 못 하겠다고 뛰쳐나온 동환은 다음날 PD 수진과 마주한다. 자랑스러운, 살아있는 기적이라 불리는 전각 장인 아버지와 닮은 아들에서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와 닮은 아들이 되어버린 장면이었다.
영화 초반부터 계속되는 외모 평가로 인한 역겨움에 미간 사이에 주름이 깊게 파짐을 느꼈고, 곧이어 자연스럽게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막상 별로 못생기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생각 자체가 가해임을 깨닫는 순간 불쾌함은 배가 되었다.
못생겨서 사진이 없다는 터무니 없는 대답에 아니면 무슨 장애라도 있었냐는 동환의 말로 알 수 있다. 동환 역시 관객과 마찬가지로 '도대체 우리 엄마가 어떻게 생겼길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 안에는, "그럴 만하다"라는 은연중의 정당화가 깔려있다. '못생겼다'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무슨 자격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일까.
영화는 영희의 사진이 공개되고, 그 얼굴을 보며 목 놓아 우는 동환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마침내 궁금했던 얼굴을 보며 드는 모든 생각이 불쾌했고 미안함으로 남았다. 그 어떤 평가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상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된다.
영규의 깊숙한 내면으로 독자를 데리고 가기 위해 독자도 그처럼 영희의 얼굴을 보지 못해야 했다는 연상호 감독의 의도대로, 우리는 영규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뿐만 아니라 영규와 같은 괴물이 되어 영희와 같은 사람들을 평가하고 낙인찍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1970년대 고도성장의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존재했던 차별과 혐오, 핍박과 침묵이 당연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오늘날 우리에게 인간 심연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자꾸만 규정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불편한 정의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