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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시대가 달라도 사람이 지닌 보편적인 정서는 같기에 그에 따른 유대감이 생긴다. 문학을 잘 읽었다면 한 번의 인생을 더 산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음에도 누군가가 경험한 상황과 맥락에 따른 이해와 공감이 쌓이기 때문이다. 양귀자의 <희망>은 촘촘히 쓰인 인물의 행적과 묘사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나서는 이들의 삶을 따라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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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작품의 주요 장소인 ‘나성 여관’의 둘째 아들 ‘우연’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삼수생인 그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 삼수생의 위치는 신분을 말하기도 모호할뿐더러 스스로 위축될 만큼의 낙오된 청춘의 언저리에 자리 잡는다. 더구나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대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사회 구조의 불안정함과 억압을 타파하고자 모인 운동권 학생이 주체가 되어 저항해나가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주인공은 이조차 참여할 수 없는 소외된 위치에 서 있다. 딱히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그의 시선은 나성 여관에 기식하는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여관’이라는 공간이 그러하듯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은 안정된 생활이 아닌 언제든 떠나야 하는 불안정한 상태를 증명한다. 여러 사람이 여관에 머물지만 서로 연대하며 일상을 묻는 공간이 아닌, 이들은 각자의 고통을 안은 채 고립되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가난에서 벗어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꿈꾸는 ‘우연의 누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가난한 사정으로 함께 살 수 없는 딸을 이야기해대는 ‘노인’, 폭력적인 사회 구조로 인해 가족을 잃은 ‘찌르레기 아저씨’, 폭력의 권력 구조에 저항하며 공동체의 연대를 위해 노력하는 운동권 출신 ‘우연의 형’,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떠난 고모로부터 초청장을 기다리며 일생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우연의 아버지’는 시대가 만들어낸 개인의 좌절과 희망의 부재를 여실히 보여준다.


희망의 불씨 하나 없는 삶이지만, 제목이 그러하듯 이 책은 희망을 논하는 작품이다. 그 까닭이라 함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현실에 대항하는 삶의 방법과도 연결된다. “시대가 괴롭고 어두워도 그것에 대응할 만한 경쾌하고 따뜻한 정신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생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없고서는 세상은 새롭지도, 새로움을 꿈꿀 수도 없다”라는 낙관론적 방향성이다.


그 방향성을 함께 따라갈 수 있었던 이유의 중심에는 당연하게도 주인공인 우연이 있다. 그는 10호실에 사는 노인에게서 풍기는 악취와 더듬거리는 말투 등에 진저리치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며 휴전선을 향해 떠난 노인의 부고를 들었을 때 그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며, 고아가 된 손자의 거처를 끝까지 책임진다. 우연이 유독 좋아하고 잘 따른 누나가 화려한 세상에 대한 열망과 가난에 대한 증오로 가출했을 때는 고군분투하며 누나를 찾고자 애쓴다. 경제적 수입이 없는 아버지가 막연하게 미국 초대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을 가족 모두가 비웃을 때도 우연은 아버지와 함께 미국과 관련된 뉴스를 세심하게 보며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내포한다. 사람 한명 한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며 그것 자체로 특징을 부여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을 조금은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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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9호실에 묵고 있는 40세 손님 찌르레기 아저씨는 형사 임용출에 의해서 사기를 당해 자살한 아내를 위해 복수를 하고자 남은 인생을 보내는 인물이다. 돈을 벌기 위해 중동까지 간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족의 죽음이다. 임용출에게 사기를 당해 돈을 모두 잃은 아내의 자살, 막대한 수술비를 마련했음에도 결국에는 살리지 못한 아들이 있었다.


혼신을 다해 가난의 굴레에서 몸부림 쳤던 찌르레기 아저씨가 원한 것은 원대한 삶의 목표가 아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평범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가 아내의 가족에게 받은 “마음의 갈증을 적셔주기 족할 만큼의 사랑”은 막대한 부가 아닌, 작은 정성과 따뜻한 마음이었음을 느끼며 시대의 불안정과 폭력 속에서 무너져 간 그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찌르레기 아저씨의 깊은 원한은 운동권 학생인 우연의 형에 의해 해소된다. 다만 우연의 형이 임용출을 죽인 이유는 개인의 원한과 복수심에 의한 것이라기보단 폭력의 기계적 수행에 따른 굴레를 끊어내기 위함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아침이, 추악한 밤을 보낸 후의 눈부신 새 아침이 정녕 필요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예고된 새날의 고통을 무시한 채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다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문 기술자인 임용출이 행하는 죽임은 그의 개인적 의지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권력에 순응하는 악순환을 자행했다는 점에서는 분명하다. 형이 저지른 살인은 ‘임용출’이라는 한 개인으로서의 인물보다는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구조적 폭력의 얼굴을 지우고자 한 의지와도 같다. 고문과 억압의 시대에 따른 개인과 집단의 고통은 임용출을 죽이면서 또 다른 시작을 열겠다는 의미를 갖는다. 새로운 시작의 도래는 과거의 악순환을 청산했을 때 가능해진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형 앞에서 우연은 여전히 형을 좋아할 것이라고 되뇐다. “악을 증오하지 않는 것은 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형의 굳은 의지 속에서 삶은 조금은 변해갈 새로움을 모색한다. 개인의 안위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공동체와 연대를 지지했던 형에게서 독자는 선의 도래와 새롭게 피어날 생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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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을 저지른 이와 그의 가족 역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나성 여관은 결국 철거를 결정한다. 빛바랜 간판을 떼어내고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 살아온 흔적을 벗겨내는 일이지만, 작품은 이 지점에서 또 다른 희망을 싹틔운다. 가출했던 누나가 잠시 돌아와 삶의 흔적을 사랑했음을 보여주었고, 복수를 위해 여관을 떠난 이후 다신 만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찌르레기 아저씨와 조우한다. 무엇보다 우연은 되돌아 나오며 전봇대의 광고지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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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가고 아침은 오는 세상이 밤의 영원한 사라짐을 의미하지 않듯이, 시대의 암울함에 눌린 개인의 삶과 기억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개인이 그가 살아온 삶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우연과 그의 주변 사람들이 나성여관에서 보낸 시간 역시 그들의 마음 한 켠에 또렷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누추하고 더럽고 때로는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나성 여관은 그만큼 아늑하고 삶의 흔적이 곳곳에 퍼져 있는 곳이다. 아예 벗어나고 싶다가도 이내 돌아와 그곳에서 피운 삶과 사랑을 떠올리게 되고, 증오하고 분노했지만, 그 마음은 삶과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감정임을 알고 있다. 이내 우리는 시선을 돌려 전봇대의 구인광고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기대한다. 공장이 세워지고 그곳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것. 하나둘 사람이 모이고 또 하나의 공동체가 거대한 마을을 형성해 나가리라는 것. 그곳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연대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며 순환한다. 그렇게 우리는 끝끝내 희망으로 다시 한번 발걸음을 내디딘다.

 

 

*참고 문헌

부용, ⌜양귀자 장편소설의 남성 주체 재현 양상 -『희망』, 『모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중심으로⌟, 춘원연구학보,(25), 2022, 283-316.

김양선, ⌜여성작가들의 장편소설에 나타난 새 경향, 김향숙 장편소설 『떠나가는 노래』, 현대문학 1991, 양귀자 장편소설 『희망』상ㆍ하, 살림 1991⌟, 창작과비평, 20(2), 1992, 19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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