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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고선웅 연출의 연극 <퉁소소리>는 조선 시대에 일어났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배경으로 하는 고전소설 <최척전>을 각색한 연극이다. <최척전>에 등장하는 평범한 한 부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은 일본 그리고 명·청나라 사이에서 외교적 노선을 잘 택해야만 했던 격동의 조선을 살아냈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격동과 혼란의 시기를 살아냈던 조선 시대 실제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 인물들을 상징화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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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과 비교했을 때, 현대 사회는 외적으로는 상대적으로나마 평화롭다. 생과 사가 오가는 아군과 적군 간의 싸움이 과거만큼은 빈번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사람들이 겪었던 그 외부적인 격동과 혼동,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고통은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혼돈의 파동들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선 이제 사람들 각자의 마음 내부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사는 것 자체가 버거울 때가 있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는 것 자체는 버거울 때가 많다. 그리고 이 감정들을 요즘 느꼈던 당사자가 바로 요즘의 나였다. 요즘의 나는 일하면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정작 그 일에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마음속에 '어떤 것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있지만, 그것 역시 막연한 이상에 불과한 것 같아 또한 마음이 불안하다.

 

불안과 무료함을 느끼며 지내던 어느 날, 관람하는 날이 되어 <퉁소소리>를 관람하러 갔다. 한국 소설, 특히 고전 소설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관람하게 되었음에도 한 평범한 부부가 혼란의 정세 속의 타의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상황에 안타까워하기도 했고, 다시 만나기 위해 머나먼 고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삶에 대한 그들의 의지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연극 <퉁소소리>를 보고, 그리고 며칠 후 소설 <최척전>을 다시 읽어봄으로써 마음에 가장 선명하게 남았던 포인트는 바로 '귀인'이었다. 이 극의 주인공 최척과 옥영은 여러 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겪는다. 그에 수반되는 것은 당연하게도 고통이기에, 그들은 삶을 마감하려 혹은 내려놓으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 삶을 그리 쉬이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주변 사람들이 그들에겐 다행히도 있었다. 포기하지 말라 말을 해주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베푼 사람들도 그들 곁에 있었다. 연극에서 가장 재미있게 다가왔던 인연의 실타래는 바로, 최척이 전쟁통에 잃어버렸던 자신의 첫째 아들 몽석과 우연히 재회하여 조선 땅으로 가던 길에 종기가 나 쓰러지고 만 최척을 발견하여 치료한 '진위경'이라는 자가 바로 최척의 둘째 아들 몽선의 부인 홍도가 그토록 찾고 싶어했던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인간 사이의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기묘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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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 무대 암전 후 다시 빛이 들어와, 일어나 객석 밖으로 나가려던 무렵 무대 위에 있던 상판의 문구가 낯선 동시에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바로 '안녕히 사세요'라는 문구였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면 그들에게 안녕한지를 (그것이 관습화된 인사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묻곤 한다. 하지만 안녕한지를 묻는 그 질문을 넘어서 안녕히 그리고 무탈하게 살기를 바란다며 건네는 그 인사말은 나에게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생기는 은은한 노을빛이 '안녕히 사세요'의 무대를 비춰주고 있었는데, 그 빛은 마치 삶이 주었던 곤경과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그 삶의 묵직한 무게를 다해낸 최척과 옥영을 향해 자연이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것 같아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비가 추적추적 오던 어느 날, 급히 나온 탓에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하고 멍하니 버스 정류장에서 내가 탈 버스를 기다리던 적이 있었다. 그 누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줄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무심히 옆에 와서 우산을 씌워주신 한 여성 분이 있었다. 작은 일이었지만 그것은 그 무엇보다 나에게 크게 다가왔고, '사람 사이에 아직도 온정이 남아 있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던 나날이었다.

 

한동안 그날을 잊고 살다가, 이 연극을 보고 나선 고즈넉한 저녁길에 그날의 온정이 문득 떠올랐다. 척과 옥영이 삶에 대한 의지로 그 척박한 외국 땅에서도 버텨내어 결국엔 조선 땅으로 귀향했다지만, 만약 그들 곁에서 그들을 도와준 귀인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들은 한 번 이별을 겪은 후 다시 만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그렇기에 연극 <퉁소소리>는 나에게 나의 귀인을 떠올리게 했던, '귀인에 대한 귀인의 이야기'다. 전쟁의 상황 속에서도 우연히 만난 귀인을 통해 힘든 삶을 다시금 살아가도록 변화시키는 이야기는 이제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귀인이 될 수 있기로 마음먹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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