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스케치의 방향성을 잡기까지 오래 걸려서, 앞으로의 시간은 스스로를 보챌 수 밖에 없다. 불만족스런 그림의 자양분이 되는 조급함 속에서 그래도 12장 분량의 전체 스케치를 완성했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콜라주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사진만으로 편집했을 때와 달리 드로잉을 더했을 때 확연히 달라지는 완성도를 다시 짚고 넘어갔다. 실제로 인물이나 조각, 심장 같은 주요 요소를 선으로 대체하거나, 선을 덧그리니 화면이 훨씬 가벼워지고 여백이 살아났다. 전체 페이지에 걸쳐 선을 부분적으로 가미한 것으로인해 통일감도 생겨서, 책 전체의 호흡을 만들어내는 장치로 적극 활용했다.
동일의 이유로 평면적인 드로잉에 패턴이나 질감, 그림자 등 일러스트 효과도 더 시도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장면이 단조롭지 않게 살아나고, ‘조각’이라는 추상적 상징 역시 해석의 여지를 몇가지 더 품고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사진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나만의 시선이 점, 선, 면의 단순한 장치를 통해 도드라지고, 그 과정에서 장면이 독자를 더 깊이 개입시키는 것이 참 재미있다.
진행 방향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책은 통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니까, 시선 방향이 자연스럽게 페이지를 이끌어야 했다. 스케치 중 '입’ 그림은 반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를 교정해 독자가 다음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도록 바꾸었다. 미끄럼틀 장면도 양쪽 페이지를 잇도록 재구성하라는 조언을 통해 그저 혈관을 상징하는 독특한 이미지로 차용한 미끄럼틀을, 흐름을 이어주는 연결 장치로 확장했다.

마지막으로, 역시 전에 없던 형식과 내용의 그림책을 몇 권 읽으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존 버닝햄의 『구름나라』는 얼마나 대담하게 여백과 단순한 선을 믿는지, 화려한 장식이나 복잡한 묘사를 덜어내고 최소한의 색과 구도만으로 장면을 구성하는데도 오히려 그 틈새에서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누누히 강조 되었던 원고와 스케치가 동어 반복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때로는 ‘비워둠’이 가장 강력한 서사의 장치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반대로 하라시마 마미의 『옥수수 옷벗기』는 옥수수 껍질을 벗기듯 독자가 위에서 아래로 페이지를 넘기며 이와 맞물려 이야기가 흘러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기에 의성어와 반복적인 리듬이 더해지니, 읽는 과정이 곧 놀이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박이도의 『사과를 그리는 100가지 방법』은 변주의 중요성이 돋보였다. 같은 오브제라도 선, 색, 질감, 배열 방식에 따라 무한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내 더미북 속 ‘조각’의 시각화와 맞닿았다.
책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는 통찰은 결국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그림책의 힘은 내용 자체와 더불어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읽히게 하는가에 있다. 이번 더미북 작업에서 내가 사진에 선을 더하고, 흐름을 고민하며, 페이지를 잇는 장치를 고민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형식의 힘을 믿어보고자 함이었다.
앞선 수업에서 ‘조각’이라는 상징을 붙들고 씨름했다면, 이번에는 그것을 어떻게 독자가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