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지금은 평화로운 마을이지만 2005년까지만 해도 일명 ‘쿠니사격장’이라 불리던 미 공군 사격장에서 나는 폭격 소리로 조용할 날이 없는 곳이었다. 1955년 한미행정협정에 따라 주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지어진 사격장은 이후 50여 년간 소음과 오폭 사고로 매향리의 주민들과 자연환경에 큰 피해를 입혔다. 주민들의 오랜 투쟁 끝에 사격장이 폐쇄된 것이 2005년. 사람들은 매향리의 역사를 잊어가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그때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매향리의 이야기가 기억되는 것, 그리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 것이다.

아트그룹 '화음'. 가장 위쪽이 김현진 아쟁연주자이다.
오는 8월 31일, 아트그룹 화음은 이러한 매향리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 <공존의 시간 II – 사라져간 것들, 그리고 남은 것들>을 무대에 올린다. 화성시에 사는 국악 연주자들로 구성된 팀은 자연스레 자신이 사는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곧 예술 활동으로 이어졌다. 작년에도 제암리 학살사건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한 공연을 기획했던 이들은 음악이 과거와 현재를 잇고 기억을 보존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18일 만난 '화음'의 김현진 아쟁연주자는 작년 공연을 보완해 더 쉽고 흥미로운 공연이 될 것이라며 이번 공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재와 연결된 과거를 연주하다

안녕하세요. 아트그룹 '화음'과 대표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화음’에서 공연 기획과 연출 대부분을 맡고 있는 아쟁 연주자 김현진입니다. 화음은 화성시 예술단의 일부 멤버들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을 더 적극적으로 하자는 취지로 모여서 결성한 팀입니다. 팀 이름에는 둘 이상의 음이 울려 조화를 이룬다는 화음의 사전적인 의미와, 화성시에 거주하는 음악인들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함께 있어요. 국악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다양한 예술 분야와의 협업을 지향하기에 ‘아트그룹’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봤습니다.
<공존의 시간 II – 사라져간 것들, 그리고 남은 것들>은 미 공군 사격장이 있었던 매향리의 역사와 그곳 주민들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주제는 어떻게 선정하셨나요?
매향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룬 짧은 애니메이션을 우연히 보고 관련 역사를 알게 되었어요. 피해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충격을 받고 자료를 더 찾아봤죠. 시민들의 항의로 사격장이 없어지기까지 50여 년 동안 오발 사고와 소음문제 등으로 많은 사망자가 나왔고 지금까지도 피해를 호소하시는 분이 많더군요. 자료를 읽으며 느꼈던 상실감과 숙연함을 음악으로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획했습니다.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해요. 사격장은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 비행장이 들어선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거든요. 같은 일이 반복해 벌어지지 않도록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희 공연이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공존의 시간 I – 꺼지지 않는 불꽃 제암리 학살사건>에 이은 공연으로 일종의 시리즈 같은 구성인데, ‘공존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요.
제목에는 사회와 지역의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애도하는 동시에 그 역사가 아직도 우리 곁에 있음을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어요. ‘공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죠. 시대와 배경은 달라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일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의 일부라는 것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부제인 ‘사라져간 것들, 그리고 남은 것들’에서 ‘사라진 것’과 ‘남은 것’은 각각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라진 것은 마을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의 삶이에요. 그래도 남은 것은 아픔 속에서 끝까지 마을의 평화를 위해 마을을 지켜낸 사람들입니다. 부제는 잃어버린 것들을 애도하는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환경을 지켜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실존하는 장소와 거기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을 듯한데,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이 어땠는지도 좀 더 들어보고 싶어요.
허투루 하지 않으려 실제 주민분들과 만나 인터뷰도 진행했어요. 기억하기 싫다고 하신 분이 많았죠.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털어놓기 어려워하시면서도 이 일이 잊히면 안 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았어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공연 잘 준비해 달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며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작년 공연에서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려 했어요. 음악과 미디어아트 중심이라 정작 주제가 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관객분들도 계셨거든요. 그래서 올해는 곡과 곡 사이 해설을 해주는 사회자가 무대에 섭니다. 저희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좀 더 분명하게 전달해주는 역할이죠. 또, 매향리에 관한 글이나 시도 미디어아트로 함께 선보여 매향리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려 합니다.
음악으로 들려주는 매향리 이야기

프로그램 구성에 소개된 여섯 곡(적설, 기억의 바다, 달빛 아래 피어난, 지금 바로 이곳에서, 밤비, 항해)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기존 곡이 네 곡, 이번 공연을 위해 만든 곡이 두 곡입니다. 첫 곡부터 순서대로 상처와 저항을 담은 과거, 애도와 치유의 과정을 담은 현재, 그리고 희망과 평화를 담은 미래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각 곡은 독립적인 느낌이지만 감정이나 주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번에 위촉 초연으로 선보이는 두 곡도 소개해 주세요.
‘달빛 아래 피어난’과 ‘기억의 바다’입니다. 의뢰할 때 작곡가들에게 매향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기서 느껴지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좋겠다고 전달했죠.
‘달빛 아래 피어난’은 밤과 봄, 그리고 비를 소재로 하는 곡입니다. 매향리의 상징인 매화는 봄에 피어나는데요, 어둠과 비를 지나 피어나는 매화가 마치 어둠과 눈물의 시간을 품고 새롭게 생명을 노래하는 모습 같아요. 그런 정서를 잔잔한 선율로 표현했습니다.
‘기억의 바다’는 영겁의 세월 동안 자연에서 그리고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인 매향리의 바다를 표현했어요. 거대한 바다와 일렁이는 파도가 인간의 고통과 흔적을 끌어안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우리를 묵묵히 위로합니다. 바다가 기억하는 시간과 매향리가 품고 있는 상처와 침묵을 그린 곡이죠.
여섯 곡 중 '화음'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가장 잘 담긴 곡 하나를 자세히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초연 곡 중 하나인 ‘기억의 바다’입니다. 매향리의 역사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출발점 삼아 전개돼요.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현악기 소리에 묵직하게 두드리는 타악기 소리가 더해져 잔잔하지만 리듬감 있는 음악이 펼쳐지죠. 한 곡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전개되기 때문에 감상하시기에 좋을 것 같아요. 특히 강조되는 대금 선율에서 바다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자를 계속 바꿔서 바다가 일렁이고 파도가 치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어요.
현진님이 연주하는 아쟁 위주로, 공연에 어떤 악기들이 사용되는지도 좀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쟁, 가야금, 대금, 피리 등 관객이 지루하지 않도록 다양한 구성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제가 연주하는 아쟁은 12줄로 개량된 아쟁이에요. 기존의 7현, 10현 아쟁보다 더 넓은 음역대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죠. 잔잔한 음악에 아쟁은 튀지 않을까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개량된 아쟁은 잔잔한 선율에도 잘 어울려요. 이번 공연에서 서정적인 곡에 아쟁이 어떻게 녹아드는지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음악이 필요한 곳에 닿도록

출연진 중 객원으로 참여하는 일렉기타도 눈에 띄었어요. 일렉기타와 다른 국악기 간의 화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궁금합니다.
일렉기타는 ‘밤비’라는 곡에 투입돼요. 전통적인 선율과 현대적인 선율이 잘 어울리는 곡이기에 일렉기타가 함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장송곡처럼 어두운 분위기이지만 일렉기타가 들어가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요. 섬세하고 부드러운 국악기와 날카로운 일렉기타의 대비로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에 있는 듯한 효과도 내려 했어요.
일렉기타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드럼, 베이스기타 같은 서양 악기와 협업을 자주 해요. 미디어아트를 하는 영상 작가님들과도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요. 저희가 전통음악을 하는 연주자들이긴 하지만 현대예술과도 균형을 이루고 싶거든요.
이번 공연은 국악과 미디어아트를 함께 감상하는 ‘융복합 공연’으로 소개되고 있어요. 공연에서 볼 수 있는 미디어아트는 어떤 모습인지 미리 조금만 들려주세요.
작년에는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프로젝션 맵핑을 선보였는데, 현장감은 있었지만 돌발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려웠어요. 올해는 이를 감안해 곡의 흐름과 주제에 맞게 미리 제작한 디지털아트를 쓸 예정이에요. 또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아트 위주였던 작년과 달리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대중적인 아트를 선보이려 합니다.
'화음'이 지향하는 국악은 어떤 형태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서로 다른 예술과 문화적 배경을 조화롭게 융합해 국악의 소리를 대중적이면서도 신선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귀가 편안하면서도 볼거리가 있는 공연을 만들어가려 해요. 유명세도 좋지만, 그보다는 음악이 필요한 곳에서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공연을 계속하고 싶어요.
노인복지시설에서 치매 어르신을 대상으로 했던 공연이 종종 생각나요. 다들 너무 조용하셔서 저희가 공연을 잘 하는 건지 걱정이 되었는데, 끝나고 직원분이 어르신들께서 이렇게 집중하시는 걸 오랜만에 봤다고 하시더군요. 재미가 없어서 조용하셨던 게 아니라 그만큼 집중하고 계셨던 거죠. 그분들에게 저희의 음악이 정말 필요했구나, 저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 방향성을 계속 기억하려 해요.
'화음'이 앞으로 해보고 싶은 공연, 만들고 싶은 음악이 있다면 무엇인지 들려주세요.
화성시에서 활동하는 환경단체가 많은데, 매향리 이야기가 환경문제와도 연결되다 보니 저희가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그분들과 교류를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다음번에는 환경을 다룬 작품들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는 공연은 재미있을 것 같아요. 화성시는 어린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화성시의 역사, 설화를 다룬 공연, 체험하며 보는 공연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분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평화와 치유의 의미를 담아 긴 시간 동안 폭격과 총성으로 고통받던 마을의 이야기를 국악으로 전달하고자 해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선물처럼 준비한 저희 공연을 보고 화성시와 매향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