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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클래식 트리오와 신디사이저의 낯선 조합’. 이 공연이라면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도 이 장르의 허들을 넘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난 10일 푸르지오 아트홀을 찾았다. 공연장을 나왔을 때 내가 넘은 허들은 없었다. 다만 음악에 휩쓸린 감정만이 남았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트리오 1번’으로 시작된 공연은 작곡가 안성균의 창작곡들로 이어진다. 작품은 총 8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각 장마다 작곡가의 개인적인 성장 서사가 담겨있다. 피아니스트 조영훈, 바이올리니스트 정지훈, 첼리스트 최영은 서로 호흡을 맞추며 섬세하면서도 격동적으로 곡을 이끌어갔다.

 

연주는 화자의 과거와 미래를 유영하며 마디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어 달렸다. 모두 다른 기억과 경험을 가진 작곡가와 연주자, 관객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듣고 각자 어떤 세계로의 몰입을 경험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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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감정의 전이


 

정해진 타이밍에 정해진 길이로 정해진 음을 연주. ‘클래식’하면 떠오르는 불문율이다. 그러나 ‘몰입’ 공연이 내게 일러준 것은 이러한 불문율이 클래식의 한계라 할 수도 있지만, 확장성의 초석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공연을 함께 관람한 친구와 나는 새로운 악장이 시작될 때마다 팸플릿을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곡의 제목과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기 위함이었다. 가령 2장 ‘섬 집 아기’의 경우 ‘아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부재와 그리움’이라는 설명이 덧붙어있었고 자연스럽게 외로운 아이의 슬픈 마음을 상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곡이 기승전결을 지나가는 동안 음악에 몰입하다 보면, 곡을 만들 당시에 작곡가가 상상했을 상황과는 거리가 아주 멀 수도 있는 나만의 공간에 도착하게 된다. 어릴 적 직접 겪은 경험뿐만 아니라 온갖 창작물을 통해 흡수한 간접 경험까지가 음악을 핵 삼아 얽힘으로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러나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은 다시 묘사할 수 없는 꿈같은 찰나이다. 곡이 마무리되며 섬집아기의 익숙한 원곡 멜로디가 나올 때, 그 꿈결 같은 여정을 마치고 서사가 마무리되는 애틋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 들어올 때 개개인에게 가닿는 기억과 진동하는 감정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에서 클래식의 역동성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연출자가 소개했듯, 이 공연은 단순히 연주를 감상하는 것이 아닌 ‘청자 스스로 음악의 흐름을 해석하고, 각자의 감각으로 몰입을 체험하도록 설계된 능동적 청취의 장’이다.


한편, 이러한 능동적 경험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것은 여덟 개의 악장 전체에서 안성균이 언급한 ‘성장’이라는 큰 테마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설득력 있게 묻어나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부분에 의해서 그렇게 느껴졌다고 특정지을 수는 없지만, 연주곡이 배경음악이 되어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은 주로 주인공이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굴곡이었다. 따라서 한 축의 주제 의식을 가져가면서도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부족함 없는 예술 상연이었다.

 

 

 

클래식, 신디사이저와 AI 시대



“AI가 음악을 작곡하고, 클래식의 심장조차 알고리즘으로 재현되는 시대에 ‘한 사람의 이야기는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이 곡은 시작되었습니다.” - 작곡가 노트 中

 

안성균 작곡가의 시대적 고민이 ‘한 사람의 이야기는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곧 그가 클래식 트리오와 신디사이저의 낯선 만남을 택하게 된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인간의 본질은 클래식의 고운 선율에서도 신디사이저의 사늘한 기계음에서도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음에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사실의 나열이 아니며, 탄생하는 것이지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공연 후반부 작곡가가 직접 연주에 나섰을 때, 모스부호를 모방한 신디사이저의 전자음이 들려왔다. 심장박동 소리 같기도 했다. 현악기의 세심한 떨림에 귀 기울였던 관객은 갑자기 마주한 전자악기 소리에 적응해야 한다. 이는 공연장의 분위기를 환기하고, 이제껏 클래식 악기 소리에서 읽어온 화자의 감정 변화를 신디사이저의 음색에서 찾아내도록 유도한다. SF 영화를 연상키도 하며, 물리적 시공간에 한정된 현장성보다는 정신적 감각에 집중하도록 하는 효과를 낳는다.


새삼스럽지만 동시에 놀랍게도, 매개물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감상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예술에 투영시킬 수 있다. 그리고 매개물의 성질이 전환되는 과정은 서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창작자는 이 교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객을 ‘몰입’ 상태로 빨아들이는 곡의 흐름을 고민했을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이야기는 비언어적 형태를 통해 여러 사람의 이야기에서 새로 태어날 수 있다.


한때 전자음악이 지나치게 ‘인공적’이라고 비난받았다면, 이제 현대의 예술가는 클래식이라는 전통적 인공물과의 파격적 결합을 통해서 음악 본래의 목적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데 있다는 초심을 돌이킨다. 공연은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자신의 두려움을, 희열을, 설렘을 저만의 방식으로 계속 표현하는 것의 가치를 증명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공유하는 인간적 경험의 교집합은 그야말로 우주처럼 무한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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