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영화 등에서 본편 시작 전의 서막을 프롤로그, 본편이 끝난 뒤의 후일담을 담은 부분을 에필로그라 한다. 이 두 용어는 그리스 신화의 티탄 신족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름 뜻부터 ‘먼저 생각하는 자’ 프로메테우스는 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했다. ‘나중에 생각하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아우 에피메테우스는 지상의 피조물인 인간과 여러 동물들에게 능력을 나눠 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여기서 에피메테우스의 나중에 생각하는 성향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동물들에게 능력을 다 나눠 준 후에야 인간에게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자식이나 다름 없는 인간들에게 더 획기적으로 유용한 것을 주기로 결심했다. 신들이 독점하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것이다. 인간들은 불을 피워 활동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고온의 불로 전보다 단단한 도구를 만들었으며, 화폐를 주조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로 인간 종족은 문명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안 제우스는 크게 분노하여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 정상에 결박한 뒤 자신의 독수리로 하여금 그의 간을 매일 쪼아 먹게 했다. 재생력 있는 장기인 간은 밤 사이 회복을 거듭했고 불사의 신에게 그것은 영원한 형벌이었다. (이 형벌은 아주 먼 훗날 제우스의 아들인 인간 영웅 헤라클레스가 그 독수리를 죽임으로써 거두어졌다.)
제우스는 인간들이 발전을 거듭하여 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경계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최초의 인간 여성 판도라를 창조한 후 그녀에게 아름다움, 지성, 뛰어난 화술, 예술성 등 다양한 축복을 내렸다.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던 에피메테우스에게 그녀를 선물했다.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선물을 조심하라는 형의 당부를 모른 척하고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이후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제우스가 인류의 성장 속도를 저해하기 위해 알차게 준비해 두었던 질병, 시기질투, 원한, 복수, 슬픔, 미움 등이 튀어나왔다. 인류는 살인과 전쟁을 알게 되었고 평화롭던 황금시대는 끝이 났다. 혼비백산하여 뒤늦게 상자를 닫은 판도라는 상자의 가장 아래에 있던 희망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상자를 열어 불행해진 세상에 희망을 내보낸다.

프로메테우스의 불 이야기를 한 까닭은 최근에 감상한 국내 창작 뮤지컬 <마리 퀴리> 전반에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메타포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네 번째 시즌을 맞이한 이 뮤지컬은 폴란드 출신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마리 퀴리의 업적과 고뇌를 다룬 팩션 뮤지컬이다. 마리 퀴리는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자 최초로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프랑스 국립 소르본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 박사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었으며, 동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였다. 후일 이 모든 업적을 인정 받아 최초로 팡테옹에 묻힌 여성이 되었다. 이토록 ‘최초’라는 수식이 많이 붙는 인생은 드물다. 이러한 삶에는 명예가 따르지만 전에 생각지 못한 윤리적 고뇌와 책임 또한 수반되었을 것이다. 팩션 뮤지컬 <마리 퀴리>는 이 부분에 주목하여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펼친다.
극의 첫 장면, 죽음을 앞두고도 실험실에 있는 마리 퀴리와 그의 딸 이렌이 등장한다. 자신은 실패했다고 말하는 모친에게 이렌은 무엇이 그토록 오랫동안 엄마의 인생을 짓눌렀는가를 묻는다. 마리 퀴리는 젊은 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르본대학 입학을 앞둔 마리는 열차에서 같은 폴란드인 안느 코발스키를 만난다. (안느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라스트 네임을 여성형 ‘코발스카’가 아닌 남성형 ‘코발스키’로 소개한다. 이는 여성으로서 받는 제약에 거부하는 저항의 일종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이주 여성인 것은 동일하나 유학길에 오른 마리 퀴리는 가난해도 식자층에 속하는 반면 안느는 공장 직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 계층인 점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마리와 안느 사이의 교감과 연대다. 짧은 만남이지만 안느는 새 원소를 찾아 주기율표라는 지도의 빈 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마리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다른 학생들은 약소국 출신 여성인 마리를 ‘미스 폴란드’라고 부르며 무시한다. 실험 자금이 필요했던 마리는 획기적인 발견을 원하던 투자자 루벤 뒤퐁을 만나게 된다. 사업가인 뒤퐁의 욕망은 전례 없던 무언가를 인류에 전파하는 새로운 프로메테우스가 되는 것이다. 마리는 실험을 계속 해 나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세간에서는 마리가 어머니 역할을 저버렸다고 비난한다. 아버지의 부고를 받는다. 넘버 <두드려>는 라듐 발견 전의 시련을 집약해 보여준다. 내가 본 회차에서는 김소향 배우가 열연을 펼쳤다. 그의 목소리를 타고 마리 퀴리의 고통이 전달되어서 멀리 떨어진 내 피부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몸 안팎에서 가시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을 마리이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실험을 지속한다. 마침내 라듐을 발견한 마리는 그것을 자신의 다른 이름으로 여긴다. 자신을 상처내어 빛을 내는 모진 원소. 바로 라듐. 마리의 ‘또 다른 이름.’

마리는 라듐 사용에 특허를 내지 않고 무상으로 제공한다. 이는 과학적 호기심만으로 새 발견에 도달했던 과학자의 선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라듐의 무분별한 사용에 힘을 보태 준 격이 되었다. 방사능 물질의 위험성 자체를 몰랐던 인류는 스스로 빛을 내는 신물질에 열광하며 온갖 상품에 라듐을 집어넣었다. 라듐수, 라듐 초콜렛, 라듐 콘돔, 라듐 크림, 라듐 치약, 라듐 시계… ‘라듐 파라다이스’의 도래다. 라듐 상품의 해당 공장에선 직공이 많이 필요했고 안느도 마리의 소개로 루벤 뒤퐁 소유의 공장에 라듐 시계 직공으로 취직한다.
안느가 만난 폴란드인 직공들은 마리를 폴란드의 별이라며 자랑스러워하고 자신들의 미래 또한 밝게 빛날 것이라 희망한다. 안느를 비롯한 동료들은 라듐 페인트가 묻은 붓 끝을 혀로 정돈하여 시계 판에 숫자를 쓰고 초침, 분침을 칠한다. 동료들이 하나 둘 턱이 괴사해 사망하지만 사측의 매수로 그들의 사인은 하나같이 매독으로 조작된다. 안느는 마리를 찾아가지만 루벤은 마리와 안느가 소통할 수 없도록 갈라 놓는다.
마리 역시 시간이 지나며 라듐의 유해성을 인지하지만 이를 발표하는 것은 두려워한다. 대신 마리는 루벤에게 공장을 멈출 것을 요구한 후 루벤 소유의 병동에 들어가 시력을 잃어가는 소녀를 대상으로 라듐을 이용한 치료의 효과를 증명하려 한다. 라듐의 의학적 효용을 확실히 증명하지 못한 채 라듐의 위험성을 공표하면 여성 과학자인 자신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벤은 공장을 24시간 가동하며 라듐 상품의 생산을 쥐어짠다. 동료들이 모두 죽고 자신도 병들어 절박해진 안느는 높은 탑에 올라 농성을 시작한다. 안느는 라듐 시계 공장의 실태를 고발하고 자신이 죽은 후 부검해 정확한 사인을 밝혀달라 주장한다. 마리는 안느의 소식을 듣고 달려가 안느가 위험한 탑에서 내려오도록 설득한다. 마리가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하자 안느는 자신이 마리를 응원하고 존경한 것은 업적 때문이 아니라 꿈을 향해 나가는 의지와 긍지 때문이었노라 말한다. 라듐의 위험성을 증명하고 밝히겠다고 다짐하는 마리를 보고 안느도 탑에서 내려온다. 이때 두 사람은 피에르가 마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라듐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퀴리 부부는 자신의 몸을 의도적으로 라듐에 노출시킨 바 있다. 피에르는 방사능에 다리가 손상되어 마차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리는 남편의 사인을 증거로 대중에 라듐의 위험성을 알리고 무분별한 사용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업의 매수로 언론에는 라듐 관련 기사가 실리지 않고 세상은 바뀌는 것이 없어 보인다. 이에 마리는 자신의 발견이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렸고 그것을 끝내 바로잡지 못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온 것이다.
과학자들의 연구는 인류에게 문명의 이기를 선물하지만 때로는 생각지 못한 부작용을 불러오기도 한다. 새로운 물질, 새로운 기술이 인체에 유해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생계를 앗아가기도 한다. 대규모 환경 오염이 일어날 때도 있다. 어떤 사고는 한참 뒤에야 원인이 밝혀져 원인 제공자에게 근원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팩션 뮤지컬 <마리 퀴리>는 가상 인물 안느를 매개로 하여 192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라듐 걸스’ 사건을 극 안으로 가져온다. ‘라듐 걸스’ 사건은 라듐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한 폐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작가는 안느를 마리의 각별한 친구로 설정하여 마리로 하여금 ‘라듐 발견의 부작용’을 더욱 개인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야광 시계로 인기가 많았던 라듐 시계 공정에는 라듐 페인트를 묻힌 가는 붓으로 작은 숫자를 쓰고 초침, 분침을 칠해야 하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이에 공장은 시력이 좋은 10대 소녀들을 직공으로 대거 고용했다. 직공들은 소모품인 붓의 재구입을 건의했지만 공장 측은 갈라지는 붓 끝을 혀로 다듬어 붓을 오래 쓸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구강에 라듐 방사능이 지속적으로 노출된 탓에 직공들은 턱이 괴사하는 등 공통된 증상을 보이며 죽어갔다. 공장은 의사에게 뒷돈을 주고 직공들의 사인을 매독으로 조작했다. 일부 피해자들은 자신도 매도 당할 것을 걱정하여 항의하기를 포기했다. 라듐 걸스 사건은 기업의 방해 때문에 소송을 준비하는 것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고난 끝에 ‘라듐 걸스’는 승소했지만 이미 많은 수가 병들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소녀 직공들의 투쟁은 노동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라듐 걸스 사건’ 후로 산업재해 발생 시 노동자가 회사를 상대로 소송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레이디경향, <세기의 비하인드 방사성 물질 '라듐' 먹은 소녀들 이야기>와 YTN 사이언스 <과학본색 라듐 발견 120년...방사선의 두 얼굴> 기사를 참조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는 과학 안에서, 오로지 궁금하기 때문에 자연의 비밀을 파헤쳤던 마리. 새로운 물질에는 새로운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은 나중에 하게 된 마리는 과학자 에피메테우스에 해당한다. 반면 인류에 있어 ‘새로운 것의 전파자’가 되려 했던 루벤은 가짜 프로메테우스라 할 수 있다.(참고로 루벤 역시 가상의 인물이다) 내가 그를 가짜 프로메테우스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라듐을 직접 발견한 사람도 아니며, 새로운 원소의 발견을 위해 몸으로 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전파하는 대가로 자신의 그 무엇도 희생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신 제우스보다 선대 신인 프로메테우스조차 자기 손으로 태양 마차의 불을 훔쳐 왔고, 자기 손으로 인류에게 문명의 씨앗을 건넸으며, 그 행동의 대가로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라듐의 발견자는 퀴리 부부였다. 루벤이 마리에게 지원한 투자금은 언다크 사의 라듐 상품 수익으로 돌아왔다. 라듐 상품이 널리 퍼진 대가는 공장 노동자들의 건강과 목숨으로 치러졌다.(소비자들의 건강도 나빠졌을 것이다.) 프랑스에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루벤은 미국으로 건너 가 라듐 상품 사업을 계속 이어가며 자신이 라듐의 전파자이기를 자처한다.
이에 반해 마리는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지만 자신을 남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긴 적이 없다. 다만 기억되고 싶어했다. 마리에게 자연의 신비를 발견하는 일이란 ‘모든 것에는 자기 자리가 있고’ 그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비록 라듐을 자신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 그것에 오명이 씌워지면 자신의 자리도 없어질까 두려워했지만, 나는 왠지 이 부분에서 작품에서 주인공 마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책임에 직면하기까지 마리가 여성 과학자로서 가지는 불안감과 절박함이 시대적 분위기 상으로도 자연스러웠으며, 작품 안에서 마리 퀴리라는 인물의 독특한 개성으로 우러나왔다.
실제로 그녀가 프랑스로 유학 온 이유부터가 모국에서 여성의 대학 입학이 불가했기 때문이었다. 부부가 함께 라듐을 발견했으나 처음에는 마리 퀴리의 이름이 노벨상 수상자 후보 명단에 올라가지도 않았다. 남편과 한 스웨덴 수학자의 반발 덕분에 마리 퀴리 역시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전까지는 피에르 퀴리의 실험실에 출입하는 것이 묵인되는 정도였고, 노벨상을 타고 나서야 정식 출입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노벨상 수상 후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 입회를 거부 당했고 두 번째 기회에서야 동료 학자들의 지지 서명을 받아 입회할 수 있었다. 마리 퀴리는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에서 최초의 여성 회원이 되었다. 현실이 이러했으니 극 안에서 보인 마리의 불안감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 극중 피에르가 피해자들을 도울 의사를 찾는 과정에서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더 아는 사람으로서의 의무.’ 과학과 의학에서 전문가 소리 듣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말이었다. 에피메테우스와 동류의 존재들이 할 수 있는 후속 방어 내지는 최소한의 속죄는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과 더 이상의 피해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노력하는 것이다.
과학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해봐야 아는’ 에피메테우스들이다. 인간은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같은 실수의 반복은 최소화할 수 있다. 사실, 새로운 물질이나 기술이 어떤 부작용을 수반할지는 알기 힘들어도 그것이 위험으로 다가올 때 소외된 계층이 더 큰 피해를 받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현실에서 그들은 라듐 시계 공장의 10대 소녀 직공들이었고, 뮤지컬 <마리 퀴리> 안에서는 약소국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인류에게는 새로움을 도입할 때 최소한의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는 피로 쓰여진 안전 수칙들의 보호를 알게 모르게 받아 온 사람들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문제다.

극의 결말 부분에서 작가는 회한에 젖어 있는 에피메테우스-마리에게 실제 역사에 남은 마리의 업적들을 들려준다. 마리 퀴리는 후배 여성 과학자들에게 여러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이동식 엑스레이 장치를 개발해 부상 입은 군인들이 진단을 더 정확하게 받을 수 있게 도왔다. 라듐을 활용한 치료가 효과를 보여 많은 환자들의 병이 호전되었다. 퀴리 부부의 연구를 바탕으로 세운 퀴리 연구소에서 마리 퀴리는 사망 전까지 연구소장으로 부임했다. 퀴리 연구소에서는 방사능 물질 사용 시 필요한 여러 안전 장치들을 마련했다.
공연 감상 후 라듐 걸스 사건과 실제 퀴리 부부의 인생 타임 라인 자료들을 읽었다. 본 팩션 뮤지컬의 연출과 설정 중에서 어떤 것이 팩트이고 픽션인지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극 전반에 깔린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메타포를 다시금 곱씹어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피에르 퀴리의 사망 시기(1906년)와 ‘라듐 걸스’ 사건(1920년대)은 작품 속 설정과 다르게 약간의 시차가 있다. 작품에서는 암 치료에 있어 라듐의 의학적 효용이 늦게 밝혀진다. 실제로는 암 치료에 라듐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진 후 사람들이 라듐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 인식했고 그로 인해 라듐의 안전한 양과 사용법도 모른 채 곳곳에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뮤지컬 <마리 퀴리>가 ‘라듐 걸스’ 사건을 극의 주요 사건으로 삼으면서 라듐 발견의 명암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픽션의 장점을 활용해 새 원소의 발견자에게 그 발견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을 물을 때, 주인공의 고뇌와 행동을 어떻게 다뤘는가가 중요하다.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한 시점은 뢴트겐이 방사선을 발견한지 불과 3년 후였다고 한다. 방사능의 위험성 인식 자체가 희박했던 시기였다. 그러한 배경에서 유례 없는 문제와 윤리적 책임에 마주하게 된 에피메테우스-마리의 고뇌를 뮤지컬 <마리 퀴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인류는 때때로 불특정다수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에서 에피메테우스인 척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경험과 기록이 쌓이지 않은 문제 상황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책임을 지려는 에피메테우스를 목격할 때, 누군가는 그 에피메테우스의 태도를 새기며 언젠가 자신의 선택에 반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뮤지컬 <마리 퀴리>의 의도이자 의의가 아닐까 한다.